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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은미 Jan 02. 2023

공간이 시간에 박제되다

기억 속 내 이야기




세월이 많이 흘렀다.

지나고 보니 내가 걸었던 길은 체념과 포기의 길은 아니었다. 나는 나를 일으켜 세워주는 에너지를 향해 나아갔다. 상황이 나를 아프게 했지만 상황에 매몰되어 나를 잘못된 길로 가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가정환경 때문에 나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잘 살고 싶었다. 행복해지고 싶었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던가. 태어난 환경은 선택할 수 없지만 선택은 내 몫이다. 휘둘릴 수도 선택할 수 있다. 극단적으로 나만 중심에 놓고 끊어낼 수도 있다. 나는 내 인생이 소중했다. 그래서 무심하게 끊어냈다.


집에서 탈출하듯 점점 멀리 떨어진 나는 내 세계를 쌓으며 30년 가까이 흘렀는데 아빠가 있는 공간은 변한 것이 없다. 아빠도, 새엄마도, 오빠도 신기하게 내가 떠난 그대로의 공간에 머물러 있다.  내가 떠나온 상태로 꿉꿉하고 불쾌한 공기가 빠져나가지 않고 그 집안에 부유한다. 그들에게만 시간이 흐르지 않은 것처럼. 시간이 공간에 박제된 것처럼. 아마도 그 밀도는 더욱 짙어졌겠지.





"엄마, 왜 울산 할머니는 보러 가지 않아?"


딸이 어느새 초등 6학년이 되었다.

언젠가 딸이 물었다.

"응........ 그건.... 엄마는 울산 할머니를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봉인했던 판도라의 상자 뚜껑을 열 때가 되었나 보다. 아이가 크면서 어렴풋이 집안 계보를 알기 시작하니 핵심적인 질문을 던진다. 심란한 마음을 다 꺼내놓진 않았지만 궁금해하는 것은 솔직하게 알려주었다.




스물셋, 그림을 그리러 서울로 상경하면서 집과는 완벽히 멀어졌다. 안 보고 사니 마음이 참으로 편했다.

안 보고 외면하면 될 줄 알았다. 처음에는 너무 좋았다. 그런데 그 공간에 발을 안 들이니 좋아하는 아빠조차 자주 볼 수 없게 되었다. 결혼을 하고 명절에 한 번씩 가는 것이 곤욕이었지만 의무라 생각하고 참고 갔다. 자주 못보는 아빠에게 얼굴을 보여줘야 하는 의무말이다.

아이가 태어났다. 사랑하는 아이한테는 그런 환경을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 공간에 내 아이를 데리고 들어간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래서 아이가 태어나고 16년 동안 나는 한 번도 아빠를 보러 울산에 가지 않았다. 언니와 내가 서울에 있고 여러 명이 움직이기 힘들다는 핑계로 아빠를 생신 때 비행기 티켓을 끊어 서울로 오시게 했다. 10년 정도 1년에 한 번 아빠를 봤다. 아빠 생신은 추운 겨울에 있어서 마땅히 어디 갈 때가 없었다. 경비일을 하셔서 하루도 주무시지 못하기도 했다. 연례행사처럼 아빠가 오시면 생신 축하를 해 드렸다. 점심을 먹고 손주들 재롱도 보시고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다 늦은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셨다. 1년에 한 번 보는데 반나절 잠깐 보는 얼굴이라니. 1년마다 표 나게 나이 들어가는 아빠를 보는 마음이 착잡하고 허망했다. 그 안타까움도 몇 년 계속되니 안부 묻는 것도 뜸해지고 전화를 해도 할 말이 점점 없어졌다. 나도 육아에, 내 삶을 사느라 그렇게 시간이 무심히 흘러갔다.


코로나가 터졌다.

코로나가 터지면서 서로 조심하며 지내다 보니 몇 년 아빠를 보지 못했다. 아빠가 나이가 든다는 생각을 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언니와 둘이 아빠를 보러 가기로 계획을 세웠는데 일정이 안 맞아 언니만 울산에 갔다. 언니가 아빠 사진을 찍어 카톡으로 보내주었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사진 속에 머리가 빠지고 백발이 된 할아버지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못 봤던 몇 년 사이 아빠가 이렇게 나이가 드셨구나. 일흔여덟 아빠 나이가 가슴 저리게 와닿았다. 아빠가 내 곁에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앞으로 몇 번이나 아빠를 더 볼 수 있을까? 어쩔 수 없다고 어떤 노력도 하지 않으면 훗날 나는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스스로에게 물었다. 대답은 아니었다. 이대로 시간을 흘려보내면 후회할 것 같았다. 머리를 써서라도 아빠를 좀 더 자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22년 여름, 제주 한 달 살이를 하며 아빠를 제주에 초대했다. 몇 년 만에 만난 아빠는 등이 구부정해지고 걸음걸이가 느려져 있었다. 발을 높이 들지 못하고 바닥을 끌 듯이 걸었다. 나이에 비해 건강하셨지만 노쇠함이 아빠의 몸 깊숙히 스며들어 있었다.

"울 아빠 이제 진짜 할아버지가 되셨네." 나도 나이를 먹어가지만 아빠 옆에 서면 난 애교 많은 막내딸이 된다. 아빠 손을 잡고 팔짱을 끼고 일부러 말을 많이 하며 웃는다. 아빠는 내가 손을 잡으면 손을 놓지 않고 걷는다. 얼굴에 살짝 미소가 비친다. 제주도에서 함께 하는 내내 나는 아이들을 남편에게 맡기고 아빠 옆에서 손을 잡고 나란히 걸었다. 엄마와 헤어지고 3년동안 아빠가 밥을 해주고 반찬을 해주었다. 고등학교 때 가방끈이 떨어졌을 때 아빠가 두꺼운 가죽끈을 손가락 아프게 바늘을 누르며 꿰매 주었던 게 생각이 난다.   제주도에서 약간 경사진 주차장에서 왼쪽으로 내리다 다리에 힘이 약해 기우뚱하며 넘어진 모습에 속상했다. 세월이 수십 년 흘러 약해진 아빠가 그제야 실감났다.


제주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아빠에게 손수 음식을 해서 차려드린 일이다. 아빠는 내가  음식을 남기지 않고 싹싹 드셨다. 맛없다고 싱겁다고, 짜다고  만한데 어떤 것을  드려도 맛있게 드셨다.

그 모습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꼭 자식 입에 먹을 거 들어가는 것을 보는 것처럼. 언제부터 부모가 내게 이런 느낌이 되었을까? 아이가 태어나면 먹이는 거 입히는 거 하나하나 신경 쓰며 감각이 사방으로 뻗어있는 게 부모다. 부모가 연로해지니 부모니까 당연하게 잘하시겠지 하던 마음이 뒤로 가고 외롭지는 않은지 건강은 잘 챙기는지 여러 것을 한 번에 살피는 레이더가 커진다.


그간 쌓인 미움도 원망도 상처도 무색하게 만드는 게 무정한 세월이다. 유한한 시간을 인식하니 애닮음만 커진다. 장성한 자식은 노쇠해지는 부모를 살피게 되는 게 삶의 순리인지도 모르겠다.





<전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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