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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EK Miyoung Jun 24. 2015

오, 나의 빨간 머리 앤

유년기의 노스탤지어_앤 셜리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 머리 앤.


어릴 때 TV에서 방영하던 수 많은 만화 영화를 섭렵한 나지만,  그중 으뜸으로 기억에 남는 건 역시 빨간 머리 앤 이다.

볼품없이 마르기 만한 여자 아이. 누가 어떻게 듣던 무슨 상관이랴, 황홀한 공상에 빠져 끝없이 재잘대는 이 시대 마지막 낭만파 소녀. 처음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먹고 '아이스크림!'을 외치던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 


 90년대 중후반, 그때의 어린이 만화 영화 시간에는 서정적 정서가 듬뿍 담긴 이야기이거나 로봇이나 소녀히어로들이 등장해 지구와 평화를 지키는 이야기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중 내 정서가 더 가깝게 맞닿아 있는 쪽은 빨간 머리 앤 처럼 소녀의 성장과 우정을 얘기하던 쪽이었다. 작은 시골 마을에 살았던 내가 앤이 겪는 크고 작은 이야기들이 꼭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숫기 없는 나 대신 저렇게 크게 말하고 웃고 심지어 공부까지 잘 하는 여자 주인공이라니! 앤은 여러 여자 캐릭터 중 내 롤 모델이 되기에도 충분했다. 게다가 그토록 예쁘게 그려낸 '초록지붕의 집'은 내 맘속에 언젠가 이루고 싶은 로망으로 자리 잡고 말았다.(여태 그러함..)


  그때의 기억이 좋았던 덕분에 빨간 머리 앤은 차차 나이를 먹으면서도 한번씩 생각나면 찾아보게 되는 애니메이션이 되었다. 고맙게도 볼때마다 다시금 새로이 찾아드는 즐거움이 있다. 그 속에서 벌어지는 아이들간의 미묘한 심리전이라던가 매튜와  마닐라가 살갑진 않지만 책임있게 주었던 앤에 대한 사랑이라던가. 뭐니 뭐니 해도 앤과 길버트의 우정과 사랑, 경쟁이라는 모호한 감정들이 부딪힐때의 짜릿함과 설렘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그리고 화면 가득 채워진 캐나다의 아름다운 풍광과 세심한 자연 묘사는 이 애니메이션의 또 다른 백미이리라. 지금처럼 애니메이션이 디지털 방식으로 제작될 때가 아니었므로, 이 모든 게 하나 하나 수작업으로 이뤄낸 따뜻한 그림들기에 더욱 그러하다.  

 

 무엇보다 이 애니메이션을 볼 때면 하루 중 만화영화 시간만 손꼽아 기다리던 어린 내가 생각난다. 지금처럼 볼거리가 풍성한 때가 아니었다. 하루 중 딱 그 시간, TV 앞에서  기다려야만 볼 수 있었던 만화 영화들은 지루하고 똑같은 나의 나날들 사이에 가장 달콤한 간식과도 같았다.(심지어 내가 살던 동네에는 이렇다 할 '점빵'도 없어다!) 시간이 흘러 '보고 듣는'데 있어 어느 때보다 풍요로워진 시대에 살게 됐지만 예전에 그를 통해 느낄 수 있었던 심리적 포만감을 느끼기는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네가 오기 전부터 나는 행복할 거야'라는 어린 왕자의 대사가 떠오른다. '기다림'이 즐거움이나 설렘이 아닌 '지루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것으로 분류된 이 시대는 더 이상 낭만과 추억을 논하기 상당히 곤란해졌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이런 추억과 고리타분함을 먹고 자란 나는 좋은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해 분주히 살아가고 있다. 언젠가 내 애니메이션을 스쳐간 누군가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이와 함께 즐거운 추억 하나 간직하고 있노라 말해준다면- 아마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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