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올라오는 날이 있습니다. 그 장소에 다시 섰기 때문입니다. 내가 꾸렸던 밝은 일상이 슬픔으로 얼룩지는 건, 나의 의지와 반하는 일입니다. 나는 슬픔을 꿈꾸지도 예견하지도 못했습니다. 어떤 이는 말할 수 있습니다. 무의식은 이미 알고 있었다고, 까르마라고.
네, 그의 말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나의 무의식이 알고 있었던 것이든, 그것이 나의 까르마이든, 지금의 나가 의도한 건 아닙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을 걷다 문득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을 봅니다. 밤 10시가 넘은 시각, 파리 골목은 큰길이어도 어둠이 진하게 내려앉았습니다. 불이 꺼진 럭셔리 브랜드 매장이 쓸쓸해 보입니다. 찬란하게 빛나던 낮시간이 지나니 고요한 차가움만 덩그러니 남아있습니다. 매장 밖 거울에 비친 내 모습과 닮았습니다.
겨울이라 그럴 수도 있습니다. 여름이었다면 당연히 달랐을 겁니다.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문뜩 올라오는 슬픔을 꾹꾹 눌러봅니다. ‘이 감정은 내 감정이 아니야! 그냥 형제 없는 느낌일 뿐이야.’ 하며 표정 없는 얼굴을 바라봅니다. 입꼬리를 괜스레 올려봅니다. 무표정한 얼굴을 알아차릴 때 하는 습관입니다.
억지로 올린 입꼬리의 모양이 예쁘지 않습니다. 한쪽이 비뚤어졌는지 쓴웃음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말거나, 입꼬리를 올렸다 내렸다를 몇 번 반복해 봅니다. 이내 힘이 빠집니다.
행인이 한두 명 있어도 개의치 않습니다. 그저 나의 차가운 슬픔만 보입니다. 나는 이 슬픔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골똘히 생각합니다.
입술이 들썩입니다. 외부에서는 되도록 울음을 참기로 했습니다. 그 편이 낫기 때문입니다. 참아도 터져 나오는 울음은 흩어지는 바람과 함께 흘려보냅니다. 흐르는 눈물은 누구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런 것에 잘 단련되어 있답니다. 몇 년간 몸으로 익힌 결과입니다.
거울에 비친 여인을 사진으로 남깁니다. 그저 그러고 싶었습니다. 이유는 나중에 설명하면 됩니다.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숙소로 발길을 돌립니다. 그리고 다짐합니다.
‘오늘 하루만 슬퍼해도 돼,’
나의 슬픔을 허락합니다. 오래는 못합니다. 딱 하루만 허락하고 싶습니다. 그럼 이틀째는 나아질 것이니까요. 사실여부는 상관없습니다. 슬픔은 아름다운 감정이나 나는 이내 할 일이 있으니까요. 어떤 할 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할 일이 있을 것입니다. 다음날 깨끗하게 먼지를 털어내고 새 출발을 하고 싶거든요. 그게 정말 내가 원하는 일일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슬픔에 빠져있을 때, 헤어 나오는 방법은 사실 거짓말입니다. 슬픔은 매우 달콤하고 따듯하거든요. 안주하고 싶은 욕망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그때 나는 말합니다.
‘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그것만 할 수는 없어! 그게 인생이야!’
슬픔을 버리는 고통을 자처합니다. 감정의 밑바닥을 찍기가 두렵습니다. 아니 사실은 시간이 없습니다. 나는 그저 속물인 겁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을 혼자 걸어야 하는 뚜벅이니까요. 슬픔이 올라올 때 내가 느끼는 세계관은 늘 이런 식입니다.
‘넌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야. 떼쓸 곳이 없으니, 이제 감정적으로 독립을 해야 해. 그러니 오늘만 슬퍼해.’
잠이 들며, 마지막 슬픔을 달랩니다. 다음날은 목소리에 힘이 있길 바라며 꿈나라로 들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