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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프코칭 67.나의 본성을 알게되는일

by 벨플러 Miyoung

한 사람이 온다는 건 그 사람이 나고 자라고 지금 내 앞에 서있을 때까지의 여정, 그러니까 그 사람의 온 인생을 느끼는 일이다.


잠깐 만난 사이라도 어느 누구의 삶은 참 진득하고 걸쭉하다. 잘 들여다보면 하나도 버릴 게 없고, 한치의 가벼움도 없다. 그렇게 보인다.

어쩌면 그는 내가 그랬듯이, 이미 우주 어디에선가 치밀한 계획을 세운 뒤 지구에 사뿐히 안착했을지도 모른다.


무생물 같던 사람도 온기를 느끼며 대화를 하면 생물로 바뀐다. 따듯한 에너지를 풍기는 사람들일수록 여운이 오래간다. 유리벽이 쳐있는 것이 당연한 세상인데, 처음부터 허물어진 존재들이 있었다. 알지 못하는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느낌에 혼란스럽기도 하다. 그런 인간들도 존재했다. 이 세상이 늘 각박하지만은 않다는 진리가 피부 깊숙이 와닿는 느낌이다.


한 주 동안 홀린 듯 세상을 보았다. 시간은 똑같이 흐르고, 계절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다. 겨울 옷을 벗고 봄이 온 지가 몇 주가 지난 듯하다. 간혹 여전히 겨울처럼 냉기가 흐르기도 한다. 익숙한 일상이다. 홀린 듯한 세상은 사람으로부터 왔다. 사람에 치이고, 이젠 이골이 났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또 다른 경험을 하더라도 평균적인 마음상태를 기대했다. 어쩌면 내게는 적당히 벽을 치고, 적당히 넘어가고, 적당히 웃어주는 그런 관계가 이제 익숙하다. 사람에게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나에게는 그렇게 되어버린 듯하다.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다. 안전하다는 생각은 한다.


그런 평균 상태가 무너지니 혼란스러웠다. 위아래로 흔들리던 시소가 마치 방향을 잃어버린 기분이다. 시소가 위아래로 흔들리지 않으면 어찌해야 할까. 옆으로 움직인다면 시소라 할 수 없다고 본다. 인간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예측하는 감정상태를 벗어나면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인간의 정의를 다시 내려야겠다.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난 뒤 며칠이 흘렀다. 서서히 내가 보인다. 그동안 혼란으로 방황했던 나의 일부는 반대를 만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명확히 보인다. 나는 성취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열심히 무언가를 쌓아 이루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매번 산더미처럼 짓누르는 머릿속 잡동사니들은 다 이유가 있었다. 여러 가지 일을 부단히도 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무언가를 해내었을 때 만족해하는 사람들의 부류인 것이다. 본성을 그리 가지고 태어났으니, 그렇게 살아가는 게 행복한 삶이겠다. 어떤 이가 한 말이 생각난다.

“눈앞에 있던 암막 커튼이 확 열리고 시야가 뻥 뚫린 기분이에요. 이제 뭘 해야 할지 그냥 척척척 다 보입니다.”


그런 느낌이 어떤 걸까 참 궁금했는데, 이제야 알 것 같다. 나를 아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 타인의 인생이 오히려 나의 본성을 깨닫게 해주는 마스터 키였다. 읽는 독자분들도 질문이 있는 사항이 있다면 그 질문에 평소와는 다른 정반대의 답을 쓰고 바라보길 추천한다. 가령 “나는 부지런해야 하는데, 부지런하지 않아 문제다.”라고 늘 생각한다면,

“나는 게으르려 하는데, 충분히 게으르지 않다. 어서 게을러져야겠다.”라고 답을 하고 그 상태가 되어보는 것이다. 결과는 기쁜 쪽이 나의 본성에 가까울 것이다. 부지런하든 게으른 나의 본성을 아는 건 인간으로서 정말 다행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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