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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윰잒 Nov 04. 2022

피아노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

 연주는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지난 10일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 당장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녀는 알 길이 없었다. 그저 짐작하기로는, 가슴팍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 기계와 울먹이는 엄마의 얼굴을 보고서 심상치 않은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현실감도, 감각도 없었다. 그녀의 엄마는 10일간 100통의 전화를 받았다. 온 세상이 그녀의 생사에 집중했다. ‘사회적 재난’이라고 명명되어 국가애도기간을 거치는 동안, 그녀와 함께 있던 누군가는 사망자 명단에, 누군가는 중환자 명단에 올랐다. 


 그녀는 촉망 받던 피아니스트였다. 27년전 클래식을 들으며 열 달 그녀를 품었던 엄마는 사랑하는 딸이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름을 지었다. 그렇게 그녀와, 자신의 이름밖에 세상에 없던 그녀는 열 손가락과 함께 세상 곳곳을 다녔지만, 현실은 우물 안 개구리인 셈이었다. 동남아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그녀에게 단 하루의 휴일도 허락되지 않았다. 집과 연습실이 전부인 연주의 삶. 반복되는 인생에 무료감을 느낀 그녀는 일주일의 휴가를 맘대로 냈고 배에 올라탔다. 남들 다 가봤다는 제주도조차 못가본 연주가 선택한 곳은 일본. 마음과 몸의 짐을 모두 내려놓고 배에 올라탄 날,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땅으로 향하는 그날. 연주는 새로 태어난 것만 같았다. 그리고 정확히 10일 뒤, 연주는 전혀 새로운 자신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유망한 피아니스트, 생사의 갈림길에 서다’ 따위의 기사로 정의될 수 있는 슬픔이 아녔다. 그녀를 처음 발견했을 때, 이미 목숨과 같던 신체의 일부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있는 상태였다. 그녀의 엄마는 알고 있었다. 피아노를 칠 수 없는 삶은 연주에게는 죽은 것과 마찬가지였으며, 연주의 몸은 깨어나더라도 마음은 쉽사리 일어날 수 없을 것이란 걸.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를 깨달은 날, 연주는 가까스로 차린 정신을 그만 놓치고 말았다. 


 그녀는 알고싶었다. 원인을, 그리고 그날의 상황을. 열 손가락이든 다섯 손가락이든 아프면 검사라도 하면 되는데, 그녀의 고통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녔다. 그러나 모두가 연주 앞에서는 말을 아꼈다. 어쩌면 할 말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본인들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라진 이들과 충격에 빠진 피아니스트를 위로하던 일도 하루 이틀. 얼굴 한 번 본적 없던 정치인들이 그녀를 언급하는 일이 잦아지자, 세상은 ‘지겹다’고 말했다. 그녀가 입을 여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피로해했다. 27년을 잃어버린 그녀에게, 세상은 단 1년도 자비롭지 못했다. 이름은 팔자와 거꾸로 간다지 않던가. 탓할 곳 없던 불쌍한 그녀는 결국 이름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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