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창비>
세 사람은 내가 모르는 아버지의 일상을 되새기는 중이었다. 나는 장례식장 사무실에 다녀오겠다며 몸을 일으 켰다. 말년의 아버지가 시간과 마음을 나누며 살았던 그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니 그저 그런 정도가 아니라 추레한 노인네 들일뿐이었다. 3초 영감으로 불린 아버지가 저들과 머리를 맞대고 말을 섞는 모습이 좀처럼 그려지지 않았다. 내가 아는 아버지는 집안에서도 언제나 민중 운운하는, 너무 근엄해서 오히려 우스꽝스러운, 그러나 마음만은 아직도 지리산과 백운산을 날아다니는 혁명가였다. 72.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232.
독재정권 치하에서 사회주의자가 갈 곳이 어디 있었겠는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버지는 초짜 농부가 되었다. 사회주의자로서의 아버지는 제법 근사할 때도 있었으나 농부로서의 아버지는 젬병이었다. 사회주 의자답게 의식만 앞선 농부였다. 아버지는 일삼아 <새농민>을 탐독했고 <새농민>의 정보에 따라 파종을 하고 김을 매고 거름을 주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농사를 '문자농사'라 일축했다. 8.
부르주아 빨치산이 또 한마디 거들었다.
“나는 정말 노동이 싫어…… 노동이 무서워……".
그 말에 아버지가 폭소를 터뜨렸다.
“북에 가거든 그런 말은 입 밖에 내지도 마소, 딱 인민재판 감이구만." 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