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턴 한국
비행기에 탑승하니 이제야 한국으로 가는구나 싶어 안심이 되었다.
비행기는 만석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는데, 군데군데 어제 난리통을 함께 겪었던 사람들이 보였다.
어제와 달리 다들 편안한 얼굴이었고, 왠지 모르게 전우애가 느껴졌다.
비행기가 출발하자마자 나는 또 기절했다.
아부다비에서 밥 먹는 시간을 빼고 계속 잠을 잤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잠이 쏟아졌다.
아부다비에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서는 두 번의 기내식이 나왔는데, 향신료 향이 느껴져 많이 남겼다.
이제 향신료는 한동안 안녕이다.
어느 정도 잤을까, 문득 눈을 뜨고 창 밖을 보니 메마른 산맥이 보였다.
중국의 상공을 지나고 있었다.
중국이라는 것은 이제 한국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잠이 확 달아났다.
그동안 아무리 긴 시간이라도 잘 견뎌왔는데, 한국에 도착하기 전의 그 한 시간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곧, 붉은 땅을 지나 푸른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한국이다!
인천공항에 비행기가 착륙했다.
역시 빠른 한국 사람들은 빠르게 줄을 서서 비행기를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도 얼른 내리려고 하는데, 동생이 외쳤다.
“내 신발이 없어졌어!”
도대체 어떻게 해야 가만히 앉아서만 가는 비행기에서 신발이 없어지냔 말이냐.
사람들이 모두 내릴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동생의 신발을 찾기 시작했다. 승무원들도 동생의 신발을 함께 찾아주었다.
그러나 동생의 신발에 발이라도 달린 것인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동생에게 포기하라고 했고, 동생은 비싼 신발이라며 울상을 지었다.
그렇게 맨 마지막으로 비행기에서 내리려는데, 출구에 다 와서 동생이 또다시 소리를 질렀다.
“내 거다!”
출구 쪽의 선반에는 동생의 신발이 덩그러니 올려져 있었다.
승무원은 이것을 찾는 것이었냐며 동생의 신발을 건네주었다.
누군가 내리면서 홀로 떨어져 있는 동생의 신발을 발견해 출구 쪽 승무원에게 맡기고 떠난 것이다.
정말 빠른 데다가 친절하기까지 한 한국인들이다.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사람의 행동이나 성격에서 출신 국가의 특색이 느껴지는 순간들이 종종 있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인천공항에서 한국사람들이 어찌나 빠르게 움직이던지!
분명 비행기에서까지만 해도 서로에게 전우애를 느끼던 사람들이, 이제는 서로를 모른척하고 빠른 걸음으로 앞만 보고 달리듯 걸었다.
시원섭섭하기도 했지만, 진짜로 한국에 도착했다는 것을 실감했다.
나는 과거의 상념에 자주 빠지는 사람이라, 가끔 아부다비에서 함께 동고(同苦)했던 분들이 떠오른다.
우리가 그렇듯 다들 잘 살고 있을 것이다.
입국심사도 빠르게 끝났다.
이때쯤, KTX 전용칸 등 해외 입국자에 대한 규정들이 많이 완화되어서 텅 빈 공항철도를 타고, 다시 KTX를 타고 우리 동네에 도착했다.
분명 출발할 때는 낮이었는데 어느새 밤이 되었다.
우리는 평소에 택시를 잘 타지 않는다.
특히나 기차역에서 우리 집은 지역의 끝과 끝이어서 한 번도 탄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집에 너무나도 빨리 가고 싶어서 기차역에서 내리자마자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기사님은 스피드레이서였는데, 그래서 엄마는 무섭다고 했고, 나는 무서워서인지, 혹은 집에 빨리 갈 생각 때문인지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리고 드디어 집이다!!
집에 도착하니 알 수 없는 힘이 샘솟아 나는 당장 짐정리를 하자고 했다. 하지만 엄마와 동생은 내일 하자며 각자의 침대에 쓰러졌다.
나도 머쓱해하며 샤워를 하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런데 시차적응이 안된 것인지, 아부다비의 호텔과 비행기 안에서 너무 많이 자서인지 잠이 안 와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입국 후 코로나 검사는 모두 음성이 나왔고, 10일의 자가격리가 시작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때 아무것도 안했냐며 과거의 나를 다그치고 싶을 정도로 먹고, 핸드폰을 하고, 자는 것의 연속이었다.
남동생에게 미리 사다 놔달라고 한 떡볶이는 맛있었고, 동생과 눈만 마주치면 아이스크림을 배달시켜먹었다.
자가격리를 하는 것은 신체적으로는 할 만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나에게 괜찮은 것이 엄마에게는 괜찮지 않다.
엄마는 여행 동안 쌓인 피로가 한 번에 터진 것인지 손가락이 아파 손 보호대를 다시 끼기 시작했고, 어깨가 쑤시듯 아프다고 했다.
그리고 불면증이 다시 심해졌다.
잠을 못 자니, 엄마는 갱년기 증상이 극에 달했을 때처럼 퉁퉁 붓기 시작했다.
자가격리기간 동안 함께 여행을 추억하며 소소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것이라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엄마는 괴로워했다.
인내의 아이콘인 엄마가 아프다면 정말 아픈 것이었다.
엄마는 병원, 특히 한의원에 가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자가격리 중에는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렇게 엄마는 고역의 자가격리 기간을 보냈다.
한편 신체적으로는 편안했지만, 내 마음은 계속해서 오르내렸다.
그 당시 나는, 엄마의 상황보다 내 처지에만 몰입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여행이 끝났는데도 무엇하나 변하지 않는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엄마는 예전처럼 활기가 넘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갱년기로 고통받고 있는 걸까?
게다가 슬슬 친구들의 회사생활이 눈에 들어왔고,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전 회사와의 계약기간이 끝나고 바로 취업 시장에 뛰어드는 대신 여행을 선택한 것은 나였는데, 그 선택에 책임을 지지 못하고 잔뜩 불안해하기만 했다.
여행은 여행일 뿐, 무언가를 치료해주거나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 때는 애써 모른척하고 있었다.
여행을 하면서 3주를 넘게 같이 시간을 보내던 때와 달리, 집안에서 함께 보내는 자가격리 기간에는 날 것의 이야기를 나누게 한다.
그 과정에서 엄마와 나의 관계도 삐그덕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계속 무의식적으로 여행을 한 만큼 엄마가 예전의 엄마로 돌아와 나에게 힘을 주기를 바랐고, 엄마는 그럴 수 없었다.
분명 함께 점심을 먹을 때는 즐거웠다가, 저녁을 준비할 때는 둘 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우리는 따로 식사를 하는 시간들이 늘어났고, 대화는 줄어들었다.
그 사이에서 동생은 이 사람들이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렇게 10일이 지났고, 자가격리가 끝났다.
격리 해제가 되는 날, 엄마는 병원들로 향했고, 나는 드디어 토익책을 펼쳐 들었다.
동생은 친구들과의 밀린 약속들을 하나하나 해치워갔다.
또 다른 변화는 아빠와 남동생이 집에 왔다는 것이다.
나는 한 달 만에 보는 남동생과 화장실 청소 문제로 소리를 지르며 대판 싸웠고, 엄마는 한 달 만에 보는 남동생을 반가워하며 기념품들을 뜯었다.
우리는 아빠와 남동생이 오면 먹자고 했던 과자들을 나누어 먹었고, 열쇠고리를 자랑했다.
아빠는 바르셀로나 구엘공원에서 사 온 도마뱀 열쇠고리를 은근하게 마음에 들어 했고, 엄마는 아빠에게 그 도마뱀 열쇠고리를 넘겼다.
대신 우리는 아빠와 남동생에게 가방과 스카프를 산 것은 자랑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가장 메인 선물인 벨트 전달식이 있었다.
우리는 특히 아빠의 반응을 기대했다.
봐! 아빠의 허리사이즈에도 맞는 벨트를 사 왔다고!
하지만 아빠는 벨트를 착용해보지도 않고 말했다.
“어어, 거기 갔다 놔.”
그렇게 성의 없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얼마나 힘들게 골랐는데.. 기운이 빠졌다.
그때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오월동주,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고 했던가? 우리는 신명 나게 아빠의 반응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그제야 아빠는 벨트를 착용해보고 마음에 든다는 말을 남겼다.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우리는 무엇도 바꾸지 못했지만, 영원히 잊지 못할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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