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다비에서 둘째 날
나와 동생이 장난 삼아 엄마를 지칭하는 말이 있다.
바로 ‘인내의 아이콘’이다.
엄마는 항상 참는다.
더워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참을만하다며 참고, 화장실 청소하는 물이 자기에게 튀었다고 패악을 부리는 남동생에게도 참는다.
우리를 양육할 때는 배고픈 것도 참고, 아픈 것도 참았다.
그래서 지금 엄마는 허리, 손목, 어깨 등 안 아픈 곳이 없다.
할 말은 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요즘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엄마는 항상 괜찮다고 하는 사람이다.
드디어 호텔에 도착했다.
우리 일행은 공항으로 돌아가는 셔틀버스가 있다는 말도 믿을 수 없다며, 비행기 출발시간 3시간 전에 호텔 로비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어느새 해가 뜨고 있었고, 호텔 1층에 위치한 뷔페도 운영을 시작했다.
우리가 받은 바우처에는 3회의 식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대로 방으로 올라가면 식사를 못할 것이라는 엄마의 의견에 먼저 밥을 먹기로 했다.
물론 밥이 잘 들어갈 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이 상황이 진절머리가 나서 이놈의 아랍에미리트, 밥이라도 거덜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쉽게 음식을 넘길 수 없었고, 그냥 씻고 싶었다.
그렇게 짧은 아침식사가 끝냈다.
식사를 하며 우리가 결정지어야 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방 배치를 어떻게 할 것인가!
세 명인 우리는 2인실을 두 개 배정받았다.
그 말은 즉, 한 명은 혼자 방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쯤 나는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다.
3주 정도를 엄마와 동생과 계속 함께하다 보니, 혼자서 쉬고 싶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나만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동생도 방을 혼자 쓰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나와 동생 사이에 설전이 시작되려고 할 무렵, 엄마가 말했다.
"내가 방을 혼자 쓸게."
게임오버다.
그렇게 나와 동생이 3층에 있는 방을 쓰고, 엄마는 혼자 5층에 있는 방을 쓰게 되었다.
호텔에는 샴푸와 바디워시 외의 다른 어메니티는 없었지만, 다행히 우리에게는 칫솔과 작은 로션이 있었다.
비행기를 탈 때는 적어도 생필품은 가지고 타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동생이 먼저 씻고, 나도 씻으려고 했지만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하고 말았다.
정신없이 잠을 자다가 잠결에 엄마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동생이 있을 자리에 엄마가 왜 있지?
하지만 나는 그 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못하고, 꿈인가 싶어 다시 깊은 잠에 들었다.
열심히 자고 있는데, 누군가가 점심을 먹어야 한다며 나를 깨웠다. 엄마였다.
계속 자고 싶었지만, 에티하드 항공사의 돈을 한 끼라도 더 써야겠다 싶어서 비몽사몽 일어났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지금 나와 함께 방에 있는 사람이 동생이 아니라 엄마라는 것을 깨달았다.
엄마는 동생을 빨리 만나야 한다며 서둘러 방을 나섰다.
그 와중에도 엄마는 엘리베이터의 위치를 찾지 못했고, 나는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어리둥절하며 엄마를 엘리베이터로 이끌었다.
로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동생과 만나, 조식을 먹었던 뷔페에서 점심을 먹었다.
택시를 태워주신 분들이나, 공항에서 함께 했던 분들과도 눈인사를 했다.
점심도 잘 넘어가지는 않았다.
전날 비행기에서의 두 끼의 기내식에 이어, 아침을 먹고 점심까지 같은 음식을 먹으니 슬슬 모든 음식에서 나는 향신료 향이 거슬리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점심을 먹으며 내가 잠든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듣게 되었다.
엄마가 홀로 방에 도착해 확인해보니 핸드폰 배터리는 32%였다.
배터리가 80% 이상은 되어야 안심하는 엄마에게는 불안한 숫자였다.
핸드폰 충전기는 동생에게 있었고, 엄마는 동생에게 연락해 샤워를 한 후에 핸드폰 충전기를 받으러 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피곤했던 엄마는 깜빡 잠에 들었다.
그리고 엄마는 눈물을 흘리면서 잠에서 깼다.
나와 동생을 비롯한 모두가 한국으로 떠나버리고, 혼자 아부다비에 남겨지는 꿈을 꿨다고 한다.
혼자 누워있던 침대는 너무나도 넓고, 호텔 방은 무섭게도 높았다.
또 방 안은 어찌나 춥던지….
눈앞의 익숙하지 않은 공간에서 공포가 몰려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고, 식은땀이 흘렀다.
엄마는 이런 것이 공황이구나 깨달았다고 한다.
방을 뛰쳐나온 엄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와 동생이 있는 방으로 오려고 했다.
하지만 호텔키를 접촉해야만 움직이는 엘리베이터는 해당 방이 있는 층과 로비층 밖에 가지 않았다.
계속 로비층과 5층만 왔다 갔다 하는 엄마에게 호텔 직원이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었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다가오는 그 직원도 엄마는 무서웠다고 한다.
뒤늦게 계단을 통해 3층으로 올라가려고 했지만, 패닉에 빠진 엄마의 눈에 구석에 위치한 비상구가 보일 턱이 없었다.
엄마는 우리의 카톡방에 다급한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정말 다행히도 잠에서 깬 동생이 엄마의 연락을 발견했고, 엄마와 동생의 상봉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내가 잠결에 들었던 엄마의 중얼거림은 ‘이 놈의 호텔은 엘리베이터도 이상하고, 계단도 없어’였던 것이다.
상황을 알고 나니 그 고생을 한 엄마에게 짠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게 왜 혼자 방을 쓰겠다고 했냐고 묻자 엄마는 말했다.
"중동은 위험하잖아."
여자 혼자 있으면 위험하다는 중동에서, 엄마는 큰 결심을 했다.
셋 중 하나가 방을 혼자 써야 한다면, 본인이 나서기로 한 것이다.
조금 어이가 없었다.
위험한 것과 엄마가 방을 혼자 쓰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지?
내가 코웃음을 치며 엄마처럼 작은 사람이 그 위험한 곳에서 왜 혼자 방을 쓰냐고 재차 묻자, 엄마는 대답했다.
"무슨 일이 생겨도, 엄마는 아줌마라 괜찮아."
엄마의 말에 담긴 뜻을 이해하고는, 말문이 막혀 한동안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고는 곧, 그런 게 어디 있냐며 소리를 질렀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이 호텔에서 엄마가 걱정하는 그런 일은 아마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엄마에게 어제 그 아저씨들이 한 말은 과장된 것이라며,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말라했다.
하지만 엄마는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한국에 있어야 하는데 지금 여기에 있는 걸 보라며,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했고, 엄마는 그럼에도 엄마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아랍에미리트는 다른 중동 국가들에 비해 비교적 자유로운 나라다.
하지만 공항 직원과 사람들의 언쟁, 구금된 것처럼 구경거리가 되었던 것, 그리고 함께 택시를 탄 아저씨들의 진심 어린 걱정, 이 모든 것을 엄마는 하루 만에 겪었다.
엄마에게 아랍에미리트는 SNS에 여성 운전권을 주장한 여성에게 징역 34년을 선고하고, 넘었는데 우연히 성기가 삽입되었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남성의 성폭행 혐의에 무죄를 선고한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중동이었다.
속상했다.
갱년기를 겪으며 손가락 마디마디가 아프고,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오는 심장 두근거림에 불안해하는 엄마가 그런 극단적인 순간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참을 결심까지 하게 한 이 상황이 너무나 싫었다.
그 순간만큼은 중동이 진심으로 싫었고, 아부다비가 싫었다.
하필이면 한국행 비행기를 취소시켜버린 에티하드 항공사도 너무나 싫었다.
점심을 먹고 방으로 돌아와서 보니, 엄마 말대로 호텔 방의 천장이 높았고, 침대도, 창문도 모두 다 컸다. 그리고 추웠다.
창 밖으로 보이는 아부다비의 하늘은 파랬지만, 어딘지 모르게 뿌연 느낌을 주었다.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다.
잠에 드는 바람에 못했던 샤워를 드디어 했다.
가지고 있는 작은 로션을 얼굴에 발랐지만 부족했다.
아부다비는 건조한 도시니까.
엄마는 동생에게 다 같이 한 방에 모여있자고 했지만, 동생은 대수롭지 않게 혼자 있고 싶다며 5층으로 올라가버렸다.
나는 엄마가 불안할까 봐 잠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또다시 기절하고 말았다.
저녁을 먹자는 엄마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켜져 있는 TV에는 알아들을 수도 없는 아랍어가 나오는 방송이 틀어져 있었고, 어느새 동생도 내려와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엄마는 한숨도 못 잤다며, 내게 참 잘 잔다고 했다.
그러게. 나 왜 이렇게 잘자지?
나는 낮잠도 잘 안 자는 사람인데, 이상하게 잠이 쏟아진다.
아침, 점심, 저녁 모두 똑같은, 게다가 향신료 향이 풀풀 나는 음식을 먹으려니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어느 정도냐면, ‘또 마라탕이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마라탕이나 마라샹궈를 정말 좋아했는데, 반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다.
나는 김치를 잘 안 먹는 사람인데도 김치가 먹고 싶었다.
떡볶이, 불닭볶음면이 먹고 싶었고, 엄마가 해준 돼지고기를 잔뜩 넣은 김치찌개가 먹고 싶었다.
그렇게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마지막 식사를 마쳤다.
창 밖은 어제 아부다비에 도착했을 때처럼 어두웠다.
이제 떠날 시간이다.
우리는 PCR테스트 결과지를 프린트하기 위해, 약속시간보다 조금 더 일찍 로비로 향했다.
호텔키를 반납하면서, 직원에게 프린트를 할 수 있냐 물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 프린트를 해줄 줄 알았는데, 호텔 직원은 나더러 따라오라고 했다.
엄마는 나를 혼자 보낼 수 없다고 했고, 결국 우리 셋 모두 직원을 따라 로비 뒤쪽으로 향했다.
어두운 컴퓨터실에서 프린트를 했다.
컴퓨터실에서 나오니, 새벽에 우리와 고통을 함께 견뎠던 분들이 모두 모여 계셨다.
우리는 에티하드 항공보다 믿음직한 호텔 직원이 불러준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갔다.
공항 전광판에는 분명하게 한국으로 가는 항공편명이 쓰여있었다.
출국심사까지 마치자, 택시비를 내주신 어르신께서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 기념으로 맥주를 사주시겠다고 했다.
엄마는 맥주를 고르는데 시간이 걸렸고, 나는 빨리 고르라고 재촉했다.
하지만 다들 엄마에게 천천히 골라도 된다며 기다려줬다.
부끄러웠다.
엄마는 항상 참고 견딜 생각만 하는데, 맥주를 고르는 그 짧은 시간도 못 기다리는 내가 창피했다.
한편, 우리 일행 중에는 한국 국적이 아닌 청년들도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뮤지컬 배우였고, 한국에 내한공연을 하러 가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자 엄마는 갑자기 우리 딸이 뮤지컬을 좋아한다며 사진을 찍자고 했다.
엄마가 말한 그 딸은 바로 나를 말하는 것이었다.
오 이런.. 우리 그런 건 비밀로 해요.
하지만 다들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한번 서 보라고 했다. 오 이런..
맥주를 마시고 게이트 앞으로 갔다.
게이트 앞에는 원래 이 비행기를 예약한 사람들과, 어제 비행기가 취소된 사람들이 몰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설마 비행기를 또 취소시키진 않겠지?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리도 드디어 게이트 문이 열렸다.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 나는 여행이 끝나 후련함과 해방감을 느꼈다.
그리고 어쩌면 엄마도 그랬을지 모른다.
인내의 아이콘인 엄마한테도 여행을 하면서 참고 인내했던 순간들이 많았을 테니 말이다.
엄마는 나이를 먹을수록 참고 감내해야 하는 일이 많아진다고 했다.
지금의 나와 동생처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기보다, 하고 싶은 말을 삼키는 순간들이 더 많아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최악의 순간을 참을 각오까지 했던 엄마만큼은 못하더라도, 우리도 엄마를 위해 참고 기다려야 하는 날들이 올 것이다.
나는 아직 맥주를 고를 시간도 참지 못할 정도로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엄마에게 항상 괜찮다고 말해주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모든 자식들은 참고 인내하는 것을 배우는 과정을 겪을까?
나는 지금 그런 과정을 지나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