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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김이 Oct 22. 2022

갱년기 엄마랑 여행가지 마라


우리는 여행을 통해 관계가 개선되길, 고민이 해소되길, 혹은 인연을 만나 연인을 만들기를 바라곤 한다.


하지만 우리의 바람과 달리, 여행은 무엇도 해주지 않는다.

여행은 그저 여행일 뿐이다.



그러니까 갱년기 엄마랑 여행가지 마라.




엄마는 여전히 나와 여행 초기에 약속했던 신경외과에 가지 않고, 한의원의 효과에 기대고 있다.

엄마는 한의사 선생님께 몸이 회복되지도 않았는데 그런 장기간의 여행을 갔냐며 혼쭐이 나기도 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엄마의 갱년기는 최고점을 찍고 서서히 내려오고 있다.


엄마의 갱년기를 치료한 것은 여행이 아닌 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우울에 허덕이며 취준생활을 하고 있다.

이제는 최종면접을 가도 기대가 되지 않는다.

그래도 끊임없이 자기소개서를 쓰고, 필기 공부를 하고, 기업을 분석하고, 면접 준비를 하며 취업준비를 하고 있다.

여전히 내 불안과 우울은 해소되지 않았지만, 그건 여행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달려있는 문제다.


이것이 여행 이후의 우리의 일상이다.





여행을 다녀온 초기에는 엄마에게 섭섭한 마음이 가득했다.

나는 엄마가 회복하길 바라서 여행을 간 것인데, 왜 내게 좋은 말 한마디를 안 해줄까?

사실 여행은 내가 가고 싶었고, 그래서 결정한 것이었으면서, 괜히 엄마를 핑계로 삼으며 괴로워했다.


엄마에 대한 내 감정은 복잡했다.


너무나도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지만, 종종 보여주었던 부정적인 모습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남들은 이별 후에 앓는다는 열병을, 나는 엄마와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지독하게 앓은 것이다.


엄마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나의 자취방 안에서 홀로 근 6개월간을 섭섭해하다가,  지내보고 싶다가, 다시 미워하는 괴로운 과정을 거치고  후에야 결심했다.


엄마를 이해하려 애써 노력하지 않기로 말이다.

대신 엄마라는 사람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여행을 하면서 나만 힘들었던 것이 아니다. 나 역시 누군가를 힘들게 했다.

엄마도 여행을 하면서 체력적으로, 그리고 나 때문에 심리적으로 힘들었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갱년기 엄마랑 여행가지 마라.


그 이유는 나 자신 때문만이 아니다.

갱년기 엄마랑 여행을 가는 것은, 오히려 엄마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행을 통해 엄마를 갱년기로부터 해방시키겠다는 것은 나의 오만이고, 욕심이다.


갱년기를 겪고 있는 엄마들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과, 그 고통을 이해해줄 수 있는 친절한 공감, 마지막으로 전문 병원에서의 처방이다.



그럼에도 갱년기 엄마랑 여행을 가고 싶다면, 자녀들이 꼭 지켜야 할 수칙들을 알려주고자 한다.



<경년기 엄마랑 여행 시, 자녀들의 여행 수칙>

1. 여행지에 대해 85% 이상의 지식을 숙지하라
2. 엄마의 여행 스타일을 미리 파악하라
3. 충분히 기다릴 줄 아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라
4. 같은 질문에도 여러 번 답할 수 있는 인내심을 지녀라
5. 언제든지 부당함에 나설 수 있는 보호자가 될 수 있도록 용기를 길러라
6. 엄마의 캐리어를 내 것과 함께 들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체력을 단련하라
7.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도록 강인하게 멘탈을 수련하라
8. 항상 엄마를 위한 간식, 휴대용품 등을 가지고 다녀라
9. 엄마와 나 사이에 취향의 차이가 있음을 인지하라
10. 반응을 기대하지 마라



수칙을 충분히 지켰고, 지킬 자신이 있다면 이제는 엄마에게 확실하게 물어볼 세 가지 질문이 있다.



<갱년기 엄마랑 여행 시, 엄마에게 물어볼 질문 리스트>

1. 기초 체력이 회복되었는가?
2. 아프면 먹는 약이 있는가?
3. 정말로 여행을 가고 싶은가?



질문에도 확실한 답을 받았다면, 여행을 고려해봐도 좋다.



불안정했던 나는 여행 수칙을 지키지 못했고, 엄마도 저 질문들 중 단 하나에도 답을 주지 못한 상태로 여행을 떠났다.

그래서 우리에게 여행은 쉽지 않았고, 제법 많은 상처를 남겼다.

저 수칙을 잘 지키고, 질문에 대한 확답을 들었다면 줄일 수 있었던 상처였을 것이다.



물론 좋은 경험도 많았고, 이제는 여행을 떠올리며 웃을 수도 있다.

이모들에게 스페인에 가봤고, 파리에서 에펠탑을 봤다고 자랑하는 엄마를 보고 있으면 뿌듯해지기도 한다.

그러다 짠순이인 나 때문에 식당을 한번 제대로 못 갔다고 험담을 하는 엄마를 보면 피가 거꾸로 솟기도 한다.



갱년기란 도대체 무엇일까?

무엇이기에 이렇게 당사자를 변하게 하고, 주변인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걸까?

잘 모르겠다.

다만 이제는 갱년기란 내가 어떻게 도울 수 없는 일이고, 묵묵히 기다리고 인내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에는 엄마가 여행을 더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


또다시 기회가 생기길, 그리고 내가 심적으로 안정적인 상황이기를, 그리고 엄마가 갱년기로부터 더 많이 벗어나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가 갔던 많은 여행지들 중에서, 여전히 엄마가 외우고 있는 것은 에펠탑뿐이다.

그렇지만 앞서 말한 수칙들을 지키며 엄마와 소중한 시간을 다시 한번 제대로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이번에 여행을 하면서 깨달은 것도 많고, 결심했던 것도 많았다.

하지만 실제로 살아가면서 그 모든 것을 지키는 그런 사람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상에 치이면서 그 깨달음과 결심을 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마음 한켠에 그 깨달음과 결심을 가지고 조금씩 개선해가며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와 엄마는 여전히 싸워서 사이가 안 좋았다가, 화해를 하고 좋아졌다가, 다시 꽁해지곤 한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할퀸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서로를 너무나 사랑한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할퀴고, 사랑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채워나갈 것이다.



사춘기인 자녀와 엄마, 그리고 갱년기인 엄마와 자녀는 그렇게 살아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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