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에서 무슨 혜택을 준다길래 일단 4살쯤 니네들을 맡겼더랬지. 아침마다 니네 둘을 들여보내면 아들은 쌩하니 들어가고 넌 우는 것도 아닌 덤덤한 표정으로 문이 닫힐 때까지 엄마를 주시했다. “잘 부탁드릴게요.” 원장님께 아부하고 선물까지 드리고 너에게 “엄마 다녀올게, 이따 할머니가 데리러 오실 거야.” 한다.
등 뒤로 너의 울먹거리는 시선을 느끼면서도 한번도 안 돌아봤지.
현관문이 쾅 닫히는 소리를 듣고나서야 바로 주차장으로 뛰어갔다. 허겁지겁 운전대를 잡고 학교까지 들어가야 비로소 이른 아침 초긴장 상태가 풀어졌다.
오후에는 놀이방 원장님이 그날 활동한 사진들을 보내주셨어. 거기에 반년 쯤 너네를 맡겼다.
엄마는 알고 있었다. 니가 억지로 가는 건지, 즐겁게 가는 건지.
하루종일 편하게 지냈는지, 손톱을 물어뜯으며 구석에서 울고 있었는지.
니가 행복한 날은 손에 꼽을 정도였을 거야. 그나마 아들 O가 잘 다니니까, 너도 가야하나 보다하고 참아낸 것일뿐. 순하디순한 네가 얌전히 들어가주면, 엄마는 마음을 놓고 뒤돌아 나갈 수 있었다.
다 알면서도 미루고 미뤘다.
이번달엔 다른 데로 옮겨줘야지, 아니다, 다음달에 옮겨줘야겠네. 이렇게 차일필 미루기만 했어.일찍 데리고 나오게 못하고 너의 불행을 외면했다. 도우미 아주머니를 오후에만 불러야 쌍둥이 돌봄 비용이 절감됐다. 외할머니도 봐주시지만, 쌍둥이 보는 게 얼마나 힘든 데, 다맡길 수도 없잖니.
너희가 오늘도 무사히 지냈구나, 안심하면서 하루살이처럼 버틴 시기였다. 특히 너의 생기를 잃은 눈빛과 표정을 나도 모르게 외면했고 오늘도 하루 종일 말을 하지 않았다는 얘길 들어도 그냥 무감각해지려고 애썼다.
엄마에겐 참 개인적으로 시련의 시기였지. 굳이 변명을 하자면 하루 24시간 몸뚱이의 모든 체력을 소진하고 영혼이 탈탈 털린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고 살아낸 시기다. 이때 네가 잘 참아줬지. 우리 어린 딸이, 그래도 엄마 힘든 걸 알고 참 많이 봐줬구나, 생각이 들 정도니까. 놀이방에서 혼자 많이 울었을 거야. 많이 참았을 거고. 그 힘든 시간 이후에 다른 후유증 없이 자라는 걸 보고는 진짜 멘탈이 강한 아이를 낳았구나 싶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아들 걔도 뭔가 애로사항이 있었을 텐데, 엄마는 딸을 자기 분신처럼 여기기 때문에 훨씬 마음이 쓰이는 것 같다.
인생에선 고정관념을 부수고 생각을 전환해야 하는 시기가 몇 번씩 찾아온다.
6살, 유치원에 들어가는 시기, 우리 모두 다시 한번 뇌를 세팅하는 거지. 초등을 준비하는 시기다. 초석을 다진다고 할까. 기초공사를 하는 게 우선인데, 그동안 읽어왔던 책이나 놀잇감 등도 새로 셋팅하고 정비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어. 일반 유치원이 아닌 영유를 선택한 이유는
막연하게 유행따라 다닌 건 아니란다. 매우매우 글로벌한 문화를 일찍 접하게 하고 싶었어. 경직되지 않은 자연스러움, 즐거운 대화, 스몰토크 등 이국적인 분위기가 좋았다. 세상에는 어린이를 위한 프로그램이 하도 많아서 유치원처럼 해볼 수 있는 거리가 많았지.
아이의 교육이나 경험치의 차이는 집집마다 부모 취향과 경험에 상당히 좌우된다.
이게 가장 두려웠어.
한끗 차이! 그게 내 인생을 좌우한다고 생각해. 비용이나 시간, 프로그램 등등 따질 것은 많지만, 엄마의 기준은 확실했다. 나는 어느 그룹에 속해 있는가? 누가 내 주위에 있는가? 나의 동료는 어떤 사람들인가?
즉, 어떤 아이들, 어떤 선생님과 내 아이들이 생활하고 공부하는지가 가장 중요해. 파티원들 말이다.
영어를 원어민처럼 말하는 건, 1:1 과외나 단기연수 그런 게 훨씬 효과적이지. 이렇게 야금야금 유치원 수준으로 해서 실력이 획기적으로 느는 건 아니야. 원어민도 아닌데 원어민처럼 할 수도 없고.
주위에 생태유치원도 있었는데 그건 가끔 숲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되고, 일반 유치원의 커리큘럼은 너무 느슨했어. 니네 돌 지나고, 엄마 나름대로 머리를 쥐어짜서 교구 수업과 책 읽어주기 정말 치밀하게 했기 때문에, 웬만한 교육기관 프로그램은 지루할 것 같았어. 타이트한 커리큘럼과 영어라는 낯선 언어와 문화가 뇌에 자극을 줄거라고 확신했지.
사람은 맨날 비슷한 것만 해선 절대 하이커리를 쌓을 수가 없다. 풀 수 있는 문제만 주구장창 풀어서 절대 등급이 안 올라가는 중고등생들이 거의 그런 이유 때문이야. 지금보다 한 단계 어려운 것을 해결해나가는 재미와 성취감을 어떻게 돈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
딸아, 그래서인지 영어유치원으로 너희를 옮겼을 때 너무나 기뻤어. 좀더 쾌적한 환경에서 너희가 지내겠구나. 거기다 글로벌한 공간이다보니 뭔가 아메리카 현지인이 된 것 같은 기대감 같은 게 있었거든. 만국기가 휘날리고 미국인 선생님이 반겨주시니 여기가 아메리카구나! 뭔 사대주의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지만, 이날부터 뿌린 씨앗이 언젠가 열매를 맺을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그래, 너희 키우며중간중간 괜찮은 선택을 한 게 조금 더 많아서 다행이긴 하다.
아무튼 니들에게 시도해본 것들 중 시행착오가 비교적 적었다는 게 행운이긴 하지.
영어, 글로벌 마인드, 무대경험, 자연스러운 어울림.
요즘 와서 가장 가성비있다 싶은 건,
나는 스무살 너희가
어느 나라의 누구를 만나거나 어느 자리에서든 무슨 이야기를 나눠도 자연스럽다는 점이다. 그게 가장 좋다.
딸아, 발전은 변화에서 나온단다.
내 능력만큼 내가 배운 만큼 계속 반복하는 것만큼 지루한 인생이 어딨겠니? 조금씩 어려운 미션에 스몰 스텝을 밞으며 계속 도전해야 사는 재미가 있지. 아무리 6살이라도 평균 어림잡는 학습을 강요해선 안 된다. 다른 사람들은 관심없고 너희들만큼은 평준화의 늪에 빠뜨릴 수 없었다.
“우리 애는 평범하게 키울 거예요.”
지루하고 식상하다. 평범한 게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 우리 부모라는 족속들은 태생부터 욕망덩어리다. 자기 자식이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낫기를 바라는 건 인지상정이야. 평범하게 키울 거라는 부모들도 발등에 불 떨어지면 더 난리를 친다. 차라리 지금 이걸 가르치는 걸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체험은 가성비가 있나요? 이렇게 솔직히 물어봐야 서로 얘기가 되지. 자식 일에 고상 떨어봤자, 얻는 건 하나도 없다. 선배맘이든 전문가쌤이든한테 납작 엎드리는 게 엄마의 주특기 아니겠니?
겸손과 굴복은 다르다. 누구 앞에서는 절대 굴복하지 말고 맞서야 하고, 누구 앞에서는 겸손하게 낮추면서 사는 게 진짜 처세술이야. 니 인생 어느 시기에 <삼국지>는 한 번 읽어봐. 세상만사 온갖 영웅이 다 나오는데, 장엄한 역사 속에서 어떻게 처신할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곱씹으며 읽게 되는 책이다.
평범하고 보통인 건 딱 질색이야. 독특한 아이디어를 내고 주변을 즐겁게 만들어라. 그게 개성이고 각자의 삶의 방식이지. 그리고 지금 하는 수준에 안주하지 말고 계속 호기심을 품고 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