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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자 Mar 15. 2017

한 남자 이야기

케냐에 다녀온 후, 또 많은 변화가 내 주변에 생겼다.

일적인 건 차치하고,

남편과 나 사이에 냉정한 온도로 이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내 마음 그 어딘가 근원을 알지 못하는 곳으로부터

무한한 용서와 관용의 샘물이 샘솟아,

시어머니에 대한 남편을 향하던 증오, 또 그로인한 내 신경적, 정신적인 증상들이 누그러지고

대신 그들에 대한 인간적인 동정이 뿜어져 나온다.


장을 보다가 노인네가 좋아할 법한 유과 한봉지를 사게 되고

아파트에 머무는 시간도 늘었을 뿐더러

냉장고에서 자꾸 뭔가를 꺼내서 반찬거리를 만들고

설거지하는 시간도 늘었다.

이제 곧 인연의 줄을 놓는다 생각하니 없던 마지막 가족애가 생기더냐.

누군 가소롭다 하겠다.


내 결정에 큰 기여를 한 사람은 누구보다 원인 당사자 그리고 나 자신이지만,

또하나 적잖은 용기를 준사람은

공교롭게도 일을 통해 알게된 ' 한 남자' 다.


일때문에 몇번 만남을 거듭하면서

딱히 설명하기 어렵지만, 왠지 싱글남일 것 같은 어렴풋한 느낌만 가지고 있었다.

좋아하는 취미도 비슷해 카톡으로 사적인 대화도 자주 오갔다.

딱 거기까지 였다.


대구 출장길에서 굳이 나를 데려다준다길래

역시 약간은 묘한 느낌을 가진 채 오랜  시간동안을 차에서 그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불행한 가정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낸 건 뜻밖에도 나였다.

난데없이 그랬겟는가.

어떤 대화의 흐름 속에서 "어디 살아요?... 어떻게 살아요?... 행복하세요?"

를 짬뽕한 듯한 묘한 질문이었던 것으로만 기억이 난다.

그때까지 서로 진솔하게 이것저것 대화를 이어왔던 터라

난 갑자기 내 상황을 그대로 얘기하고 싶은 용기가 났고

기어이 내 입으로 그걸 밝히고야 말았다.

그와 동시에 터져나온 그의 대답은 과연 내 예상대로

싱글남.. 정확히는 돌싱남인 상태란다.

오히려 나보다 더 장황하고 신나게 어렵사리 결혼의 늪에서 빠져나온 걸

마치 죽음의 전쟁터에서 살아나온 것마냥 숨을 헐떡이며 말을 이어간다.

그 것은 마치 자기와 처지가 비슷한 유부녀에 환심을 사기 위해

부풀리거나 동정을 사기위한 그것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 속싶고 아픈 이야기를 할 곳이 없어서 대나무 밭만 찾아다니다

겨우 터놓아도 될 법한 사람을 만나 한꺼번에 봇물을 터뜨리는 느낌이랄까...


우린 서로의 상황을 서로 경쟁하듯이 폭탄 공개하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적어도 나는 우리 둘다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내가 사는 빌라앞까지 데려다주고 헤어지고나서

나는 짐작했다.

아 이번엔 정의하기 어려운 남녀관계가 형성되는 구나...

결국 이성의 뻔한 그것으로 치달을 텐데 그 과정은 좀 독특할 것 같다는.




그저께 서울에서 그를 또 만났다.

그 전에 카톡으로 편하게 대화를 주고받아왔던 터라

난 친구처럼 스스럼 없는 척 시간되면 커피나 한잔하자는 아주 상투적인 제안을 했고.

의외로 쉽게 그는 응했다.


업무미팅을 마치고

복잡한 도심속에서 서로 한참 헤매다 겨우 만나게 되었고

우린 변변한 식사도 못한채

커피 한잔으로 장장 2시간 이상을 대화했다.

일얘기, 케냐얘기, 그리고 나의 근황...


다음엔 안양에 동창이 하는 해물포차집에 꼭 같이 가잖다.

그러마 했다.

과연 먼저 연락을 줄지는 모르겠으나.

이번엔 내가 먼저 사적으로 만나자는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이다.


빈속에 커피만 들이켰더니 머리가 아프고 속이 미식거린다.

그는 오늘내일하는 엄마의 곁을 지키러 병원으로 달려가는 와중에

카톡으로, 뭐라도 좀 먹을 걸 그랬나봐요 ㅎㅎ


어찌보면 사적인 만남의 첫 제안을 한 사람은 나였다.

도대체 무슨 심리였는지...

근데 그걸 반겨주고 다음번 식사를 제안하는 그는 또 무어란 말인가...


설사 이혼 준비과정중에 정이 깊어져

남들 한다는 불륜? 같은 건 절대로 하지 않으리라.


출출하다.

강냉이 한사발하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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