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로 가는 길
나는 어린이집 무렵부터 대학을 진학하기 전까지 전라남도 장성군에 살았다. 그 전에는 광주광역시에 거주했는데, 세네 살 무렵 나의 아토피가 심해져 아빠의 고향인 장성으로 다시 이주하게 되었다. 장성은 광주광역시의 북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현재 거주하는 인구 수는 사만 명이 조금 넘는다. 노인 인구가 거진 30 퍼센트는 되는 초고령 사회다. 노동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광주로 통근을 한다. 말하자면 몇몇 사람들에게 장성은 광주의 위성 시골쯤 되는 셈이다. 장성 읍내에서 광주 북구까지는 차량으로 20분 가량 소요된다. 광주의 경계와 맞닿은 장성 남면에서는 무등산자락이 훤히 맨눈으로 보이는 정도다. 도시와의 접근성은 이루말할 수 없이 훌륭하다. 단, 당신이 운전을 할 줄 안다면 말이다.
학창 시절, 나는 장성을 정말 싫어했다. ‘장성에 있다’라고 생각하면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하고 근질거렸다. 아무도 내 생활반경을 제한하지 않는데, 마치 어딘가에 갇혀 있거나 구속되어 있기라도 한 것 같은 막막함이 있었다. 나는 그런 감각을 아주 싫어해서, 늘 집이 아닌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살았다. 이상한 점은, 꾸역꾸역 버스를 타고 광주종합터미널에 도착하는 순간 터질 듯이 머리를 짓누르는 무력감이 조금이나마 해소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거진 매주 광주에 갔다.
그렇지만 광주, 도시로 가는 길은 꽤 험난했다. 일단 읍내로 나가는 것부터가 고역이었다. 나는 읍내에서도 차를 타고 10분 넘게 들어가야 하는 S면에 살았다. 그것도 운전을 해야 10분이지, 불친절한 낡은 버스를 타고서는 20분도 넘게 걸린다. S면에서 읍내로 가는 버스는 대충 하루에 여섯 대 정도 다녔다. 버스 시간표에는 버스가 언제 종점을 출발했는지만 적혀 있었기 때문에 나는 대충 언제쯤이면 버스가 오겠구나, 막연히 기다리곤 했다. 보통 종점을 지나고 20분쯤 뒤면 버스가 왔다. 그렇지만 시골 버스는 정말 제멋대로여서, 어떤 날에는 5분 일찍, 어떤 날에는 10분 늦게 버스가 왔다. 어쩌다 조금 늦게 정류장에 도착한 날은 혹여나 버스가 이미 떠났을까 전전긍긍 마음을 졸여야만 했다. 정류장 앞에 위치한 슈퍼 주인에게 몇 번이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읍내 가는 버스 아직 안 왔지요?"
슈퍼 주인은 그럴 거다, 건성으로 대답하고 말았다. 그러나 버스를 놓치면 한두 시간을 더 기다리거나, 엄마를 조르거나, 그날의 외출을 단념해야만 했다. 엄마는 운전을 아주 싫어했고, 나는 외출을 단념하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버스 정류장에서 아주 오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렇게 광주로 가는 위한 첫 관문을 통과하고 나면, 나머지는 꽤 간단해진다. 장성터미널에서 광주터미널로 향하는 버스는 꽤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재수가 없으면 30분에서 1시간 정도는 기다려야만 했다. 가끔은 버스가 출발하기 직전에서야 터미널에 도착해 버스 기사님을 잡고 빌듯이 외치곤 했다.
"기사님, 저 빨리 표 끊어올게요!"
느긋한 기사님은 손짓을 하며 나를 기다려 주었지만, 가끔은 허겁지겁 표를 사고 왔더니 버스가 이미 떠난 경우도 많았다. 그러면 울적한 마음을 안고 낡은 플라스틱 벤치에 앉아 다음 차를 기다렸다. 그래도 한 번 버스가 출발하고 나면 광주터미널까지는 2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집에서 읍내까지 가는 데는 이리저리 기다리다 보면 한두 시간이 훌쩍 지나곤 했는데, 읍내에서 광주까지는 금방이었다.
그렇게 복잡한 여정을 거쳐 광주에 닿은 뒤에는 마음이 편해졌다. 추측하건대, 거기서부터는 내가 원하는 곳은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느긋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서울처럼 1-2분마다 대중교통이 도시 곳곳을 이어주는 것은 아니지만, 길어야 10분의 기다림이면 원하는 목적지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내가 원했던 것은 그런 감각이었던 것 같다. 내가 원할 때, 원하는 곳으로 마음 편히 발걸음을 옮길 수 있다는 안정감 말이다.
기본적으로 시골에는 걸어서 갈 수 있는 장소가 거의 없다. 내가 살던 S면에는 면사무소, 파출소, 우체국, 초등학교, 농협, 구멍가게 규모의 작은 슈퍼가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편의시설의 전부였다. 최근에는 보건소가 생겼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본 적은 없다. 나는 사실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이 모든 시설을 도보로 누릴 수 있는 곳에 거주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시절, 같은 반 친구 중 걸어서 집에 갈 수 있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넷밖에 되지 않았다.(물론, 우리 반/학년은 총 17명밖에 되지 않았다) 면소재지에서 더 떨어진 곳에 거주하는 친구들은 학교에 오고가는 일도 쉽지 않았다. 소포를 부치는 일도, 은행에서 업무를 보는 일도, 슈퍼에서 과자를 사 먹는 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쨌든, 편의시설을 이용하고 싶다면 온전히 어른의 계획과 일정에 맞추어 우리의 볼일을 해결해야만 했다. 어린이로서, 그건 꽤 눈치가 보이고 스트레스 받는 일이었다고 나는 증언할 수 있다.
초등학교 때, 학교가 평소보다 일찍 마쳐 스쿨버스 시간이 애매한 날에는 친구들이 다 같이 우리 집에 왔다. 이 지역 최고 유흥거리가 ‘우리 집’이라니! 생각해보니 재미있는 일이다. 우리 집은 카페나 노래방 같은, 일종의 살롱이었던 것이다. 수많은 초등학생들을 먹이고 놀아주느라 고생했을 우리 엄마에게는 박수를 드린다.
그렇지만 우리 집이 살롱이었건 아니건, 그와 상관없이 이동의 제한에서 오는 무력감은 컸다. 나는 우습게도, 종교를 통해 이를 극복하고자 했다. 신앙심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이동 능력에 대한 이야기다. 교회를 다니면 교회 차량을 타고 온갖 곳을 누빌 수 있었다. 나는 교회 차량에 앉아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며 낯선 풍경을 눈에 담았다. 그 정도면 주말 오전을 헌납하기에 적절한 거래라고 생각했다. 가끔씩 찾아오는 주말 워크샵이나 여름 성경 캠프 같은 이벤트는 짜릿하기 그지없었다. 낯선 장소에서 새로운 친구들과 잔뜩 어울리는 기회라니, 새로움에 목말라하는 어린이에게는 아주 소중한 시간이었다. 물론, 지금은 딱히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 그렇지만 여전히, 장성과 같은 시골에서 종교 단체가 행하는 봉사 정신은 높게 평가한다. 인구 밀도가 낮고 소외 계층 비율은 높은 지역 사회에서 마을 단위로 넓게 가지를 뻗고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일은 지역자치단체보다 교회 단체에서 더 적극적이라고 느낀 적도 많기 때문이다. 복지의 의무를 개별 단체에 떠넘기는 것이 아닌가 싶어 괜히 걱정도 되지만, 여전히 교회단체 없이 시골 지역사회가 돌아가는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학창시절로 다시 돌아가서, S면에는 중고등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읍내에 위치한 여자중학교로 진학했다. 그게 얼마나 별세계였는지 모르겠다. 장성 읍내는 일자로 된 왕복 이차선 도로를 중심으로 시가지를 이룬다. 학교에서 시가지를 향해 조금만 걸으면 분식집이, 분식집 옆에는 문방구가 있었다. 번듯한 도서관도 있었다. 학교를 마치면 나는 친구와 파리바게트에서 빵을 하나씩 사들고 앉거나, 김밥천국에서 라볶이 하나를 시켜 나눠먹으며 조잘거리며 실없는 이야기를 나눴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는 버스를 타야만 하는 시간이 되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놀았다. 초등학교 때는 읍내에 나가는 것 자체로 큰 고민이고 엄마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는데, 중학교는 ‘읍내에’ 위치해 있었다. 이 사실이 얼마나 특권처럼 느껴졌는지. 발걸음을 옮기면 논밭이 아닌 어딘가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이 아주 행복했다.
그렇지만 만족감도 잠시, 새로운 갈증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더 큰 세계’ 속에 사는 친구들을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읍내에 살며 광주로 학원을 다니는 친구’ 말이다. 남들과 비교하고 경쟁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신자유주의 세계관에서 나는 좌절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남들 하는 것은 다 해봐야 하는 사춘기가 함께 왔다. 강박이 심해졌다. 머릿속은 ‘파리바게트에 앉아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일이 있을 텐데’같은 생각으로 가득 찼다. 학교가 끝나고 주어진 한 시간 남짓의 자유시간을 어떻게든 알차게 소비해야 한다는 강박이었다. 그 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걸어서는 어느 문명에도 닿을 수 없는 시골, 집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이 나를 더 괴롭게 했다.
장성읍 시가지는 아주 작아서, 일자로 된 중심가의 끝부터 반대쪽 끝까지는 대략 걸어서 30분 정도 걸린다. 그보다 먼 곳은 이동하는 데만 한 시간이 넘게 걸려서 쉽게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장성은 내게 체념과 상실의 지역이었다. 아무 것도 없고, 그나마 있는 시설도 내 힘으로는 찾아갈 수 없는, 그런 곳 말이다.
결국, 시골에 사는 청소년으로서 내가 괴로웠던 점은 이동성에 있다. 원하는 곳에 가려면 그곳으로 가는 데만 꼬박 하루를 쓰거나(돌아오는 대중교통 있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보호자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지 조금 더 분위기가 좋은 카페에 가고 싶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다. 청소년도 친구들과 ‘사회생활’을 하지 않는가. 친구를 만나러 가려면 두 시간에 한 번 오는 버스를 애타게 기다리거나 부모님을 졸라야 한다는 점은 잔인하다. 부모님의 도움으로 읍내에 진출하게 된다면, 거기서부터 비밀은 없다는 점도 스트레스의 주 원인이었을 것이다. 보통의 주양육자는 마땅한 사유 없이, 행방을 모른 채 아이를 어딘가에 태워다주지는 않으니 말이다. 또, 청소년기만큼 유행에 민감한 시절이 있을까?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은 페이스북이 널리 쓰이던 때다. 유행을 하건 말건, 시골에 사는 아이들은 허니버터칩을 사러 편의점 헌팅을 갈 수 없다. 스스로의 의지로 행하고자 하는 일에 누군가의 허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나를 많이 좌절케 했다.
그렇지만 앞서 언급한 모든 단점은 당신이 성인이고, 자차가 있다면 순식간에 해결된다. 사실, ‘시골에서는 차 없이 살 수 없다’ 정도로 제목을 바꿔야 옳다. 자차 없이는 식재료 장을 보는 일마저 쉽지 않다. 마트 장을 보러가기 위해 두 시간에 한 번 오는 버스를 기다리고, 또 시간을 맞추어 장보기를 끝낼 수는 없지 않은가. 시골에서는 차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보통 배달이 되지 않기 때문에(읍내에 있는 피자 배달 전문점에서는 10판 이상 주문했을 경우에만 S면까지 배달을 해줬다) 음식은 가서 직접 포장 해 와야 한다. 도서관도 읍내에 있다. S면에는 다방만 하나 있고 앉아서 노래를 듣거나 컴퓨터를 할 수 있는 카페는 없다. 병원에 가는 일도, 체육관에 가는 일도 모두 차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차가 있다면, 아무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더 좋은 점은, 시골은 차가 전혀 막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양 옆으로 계절감을 물씬 풍기는 논과 밭, 하천을 매끄럽게 가로지르고 나면, 마치 로드트립을 즐기는 듯한 해방감이 찾아오기도 한다. 시골에서의 운전은 도심에서의 운전과 완전히 다르다. 보통 왕복 이차선인 도로는 카페트처럼 덩그러니 펼쳐져 있어, 그 길 위에 있는 동안은 마치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물론 너구리나 뱀, 고라니 같은 야생 동물은 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차가 있다면, 읍내에 있는 것보다도 더 규모가 크고 편안한 분위기의 카페도 손쉽게 방문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장성은 광주에 아주 인접해있기 때문에 광주에서 오는 드라이브 방문객들을 대상으로 한 대형 카페가 많다. 이런 대형 카페들은 보통 대중교통으로는 닿을 수 없는 인적이 드문 산길이나 마을에 위치해 있으며, 거대한 주차장을 마련하고 있다. 근처에 있는 것이라고는 도로와 작은 마을뿐인 카페는 주변에서 오는 소음 없이 사람들의 대화 소리와 음악 소리만으로 이루어져 차분하다.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공간에서 책을 읽는 순간이 명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여기서 고백하자면, 사실 나는 아직 자차가 없다. 그렇다. 나는 여전히 엄마아빠의 기동성에 기대어 살고 있다. 실제로는 차량도 소유하지 않은 주제에, 이런 평가를 내리는 것이 우스울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청소년기와 현재의 나는 완전히 다르다. 과거의 나는 어딘가를 가는 일에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야 했지만(허락을 받기 위해 거치는 평가의 순간도 있다), 지금의 나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먼저, 금전적 독립을 통해 택시비를 낼 여력을 갖추었다. 물론 시골에서의 택시는 도시처럼 빠릿빠릿하지도 않고, 가끔은 콜을 잘 받지도 않고, 값도 되려 비싸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온전히 그 이동에 드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님을 택시처럼 이용하는데도 보다 당당할(?) 수 있었다. 내가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때 더 이상 다른 누군가의 승인은 필요하지 않다! 운전을 극도로 싫어했던 엄마가, 다년간의 직장생활을 거치며 운전을 편안하게 여기게 되었다는 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교통 체증 없이 아름다운 도로를 달릴 수 있다는 사실은 사랑스럽다. (물론 장성읍내에는 해당사항이 없다. 장성읍내는 일반적인 시가지의 축소판처럼 생겼기 때문에, 못생긴 70-80년대 건축물이 즐비하다) 부모님의 차량으로 읍내과 S면을 왕복하는 운전 연습을 몇 번 해본 적이 있다. 청소년 시절 어렵게만 느껴졌던 그 길이 얼마나 곧고 빠르던지. 그 때 처음으로 장성은 살만한 동네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 살면서, 차를 타고 언제든 편의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면 그래, 살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