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시작하며
“넌 네가 입은 게 뭔지도 모르고 있어. 그건 그냥 '블루'가 아니야. 정확히 ‘세룰리안블루(Cerulean Blue)’ 지.
또, 당연히 모르겠지만…(중략)…사랑받다가, 시즌을 마감할 때까지 수백만 달러의 수익과 일자리를 창출했지.
그런데 이 방에 있는 사람들이 ‘이딴 거’ 중에 고심해서 선택한 색깔의 스웨터를 입고 있으면서 자신은 패션계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다니, 웃기지 않니?”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패션잡지 편집장 미란다가 주인공 앤디의 무례함을 지적하며 하는 말입니다. 앤디는 패션계가 허영으로 가득 찬 바보들의 세계라고 우습게 여기죠. 세상에, '이딴' 허리띠 색깔이 좀 차이 나는 게 뭐 그리 중요한 일이겠어요? 하지만 그런 앤디가 입은 스웨터 하나조차 수많은 사람들의 고민과 철학의 산물이었습니다. 앤디 자신은 절대 몰랐겠지만요.
당신의 옷장에는 어떤 옷이 걸려 있나요? 앤디가 입은 것 같은 스웨터? 티셔츠? 청바지? 치마? 줄무늬인가요, 아니면 아무 무늬도 없나요? 길이는 무릎보다 더 짧나요, 아니면 정강이를 덮을 만큼 긴가요? 어쩌면 전부 다일 수도 있겠네요.
그래요.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가 아침에 갈팡질팡하다 대충 집어 드는 옷 한 벌도 한때 최초였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혁신이라며 찬사를 듣거나 반대로 우습다고 조롱당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조금 거창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항상 역사를 걸치고 돌아다니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흐름을 '복식사'라고 부릅니다.
복식사는 말 그대로 패션의 역사입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걸친 천에서부터 어제 우리가 입고 세탁기에 돌린 옷까지, 그 모든 것을 복식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몇백 년씩이나 비슷하게 유지되던 의복의 형태는 세기의 경과에 따라 몇십 년에서 십여 년 간격으로, 이제는 분기보다도 더 짧은 간격으로 바뀌고 있죠. 세상이 점점 더 빠르게 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패션은 몇몇 사람들에 의해 기계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정치, 경제, 사상적 흐름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니까요. 전쟁이 일어났거나 불황이 찾아오면 쇼윈도에 걸린 옷들도 함께 바뀝니다. 코로나 이후 사람들이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부드러운 색감의 편안한 옷이 유행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죠. 저는 이런 역사를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렇다고 이 작은 꼭지에서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전 세계를 망라하는 모든 옷들을 전부 다룰 수는 없겠죠. 저는 전공자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설명할 만큼 지식이 풍부하지도 않고요. 그래서 저는 복식사의 한 영역을 선택해, 비전공자의 입장에서 여러분께 이야기를 들려 드리려고 합니다. 바로 현대, 서양의, 여성의 패션에 대해서입니다.
우리가 현재 입고 있는 옷은 서양의 의복에 큰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어느 시대보다도 현대에 서양의 복식이 가장 급격하게 변했으며,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의 형태도 이때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남성에 비해 여성의 패션이 비교적 큰 변화를 보였죠. 여성의 사회 진출이 본격화된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이후부터 여성에게 필요한, 일하기에 편한 옷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192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10년 단위로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왔는지, 그로 인해 어떤 여성복이 출현했는지 알아볼 겁니다. 영어나 낯선 전문용어의 사용은 최대한 줄이고 쉽게 이야기를 풀어가려고 합니다. 또한 설명만으로는 옷의 형태를 상상하기 어려울 수 있으니, 제가 그린 일러스트와 언급하는 자료들을 참고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이제, 옷장을 같이 열어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