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재입장" 중입니다
나에겐 조금 낯설고 조심스러운 세계가 있다.
내 이름 석자보다는 'ㅇㅇ이 엄마'로 불리는 세상.
말보다는 눈짓으로 인사를 주고받고,
그저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묘한 유대감을 형성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늘 한 발쯤 비켜서 있었다.
누구와도 특별히 깊은 속얘기를 나누진 않지만
그래도 어색한 인사만큼은 빠뜨리지 않으려 애쓴다.
표정으로 불편함을 감추고,
형식적인 웃음으로 관계를 맺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그게 나에겐 최선이었다.
그런 나에게 먼저 편안하게 다가와 준 사람이 있다.
처음 본 날부터 스스럼없이 날 "언니"라고 불렀고,
어느 날은 밥 먹으러 오라며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그렇게 우리는 가까워졌다.
그녀는 두 아들의 엄마였다.
그녀의 첫째와 나의 아들이 친구였고
그 인연 덕분에 우리도 친구가 되었다.
그녀는 늘 밝고 유쾌했다.
수시로 "언니, 차 한잔 할까요?"라며 연락을 해오고,
작은 일에도 크게 웃을 줄 알며,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나누는 사람이었다.
내가 SNS에 강의 사진을 올리면
그녀는 어김없이 "언니 진짜 멋져요" 하며 응원의 댓글을 남겼다.
짧지만 따뜻한 말.
진심이 느껴져서 늘 고마웠다.
그날도 그녀가 날 집으로 초대했다.
식탁 위에는 과일과 샐러드가 놓여 있었고
나의 방문과 동시에 주문해 놓은 샌드위치가 도착했다.
커피를 내리던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언니... 앞으로는 자주 보기 힘들 것 같아요."
"왜? 무슨 일 있어요?"
"나 마트에서 일하게 됐거든요."
"아... 그래요?"
순간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그녀의 표정을 살피려 했지만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익숙한 미소, 평소처럼 밝은 말투.
그래서 더 알 수 없었다.
그 표정 안에 담긴 마음을.
커피잔을 내려놓은 그녀는 묻지도 않은 자신의 얘기를 꺼냈다.
"그냥 애들 학원비라도 벌어보자 싶어서요.
어차피 애들 학교 가고 나면 혼자 집에 있으니까 그 시간에 나가서 조금이라도 벌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그녀는 한때 인정받는 프로그래머였다고 했다.
"일할 땐 야근도 많고, 늘 피곤해서 결혼하면 일 그만둬야지 싶긴 했는데...
막상 애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쉬게 되니까 언니처럼 일하는 엄마들이 부럽더라고요.
집에서 놀고 있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애들 커 가면서 돈 들어갈 때도 많아지는데...
조금이라도 벌어야겠다 싶어서 다시 일하려고 알아보니까
갈 데가 마트 밖에 없더라고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마트밖에'라는 말속에는 선택지의 좁음에 대한 아쉬움도,
한때는 프로그래머로 활약했던 자신과의 거리감도 함께 담겨 있었다.
"그래도 괜찮아요. 다음 주부터 출근인데, 사실 좀 떨려요.
몸은 힘들겠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일하러 나간다니까 괜히 좀 설레기도 하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나는 무심히 웃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니, 나 이제 다시 세상에 나가보려고요.'
그렇게 말하진 않았지만, 나에겐 들렸다.
'엄마'라는 역할에만 머물던 그녀가
다시 이름 석 자를 가진 '나'로 돌아가려는 발걸음 소리가...
누군가는 그것을 '커리어의 후퇴'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분명히 회복의 시작처럼 보였다.
상실의 시간이 길었던 만큼,
그 시작이 더 단단하고 귀해 보였다.
어느 마트냐고 묻지는 않았다.
굳이 알 필요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녀가 그렇게까지 말해준 용기를
괜한 호기심으로 흩트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녀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일터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에 '재입장'하는 중이다.
그리고 나는,
그 여정을 묵묵히 지켜봐 줄 한 사람이 될 수 있어서 조금 기뻤다.
사람은 누구나 다시 자신을 회복할 수 있는 순간을 기다린다.
그 기회는 거창한 성취나 대단한 목표가 아니라
조용히 자신의 이름을 다시 불러주는 작은 결심에서 시작된다.
당신에게도 분명, 한때 빛나던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이름 석 자만으로 불리며
성과와 칭찬 속에서 스스로를 증명하던 날들.
그 시절의 내가
지금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었다고 느낄 때도 있을 거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주춤거리는 당신도 괜찮다.
그 빛나던 시절은 사라진 게 아니다.
다른 모습으로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을 뿐...
삶의 방향은 언제든 다시 그려질 수 있다.
부디 당신 안에서도
삶을 다시 설계할 수 있다는 믿음이 조용히 자라나기를.
그리고 그 믿음이 언젠가, 당신을 다시 한 걸음 내딛게 하기를...
*오늘의 질문*
: 지금, 어떤 모습으로 당신의 인생에 '재입장'하고 있나요?
삶은 단 한 번의 선택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잠시 멈추는 시간도, 돌아가는 길도,
그리고 전혀 다른 방향의 출입구도 존재하니까요.
지금 당신은 어떤 마음으로, 어떤 모습으로 다시 세상 앞에 서고 있나요?
그것이 비록 작고 평범한 일일지라도,
그 안에 당신만의 의미와 빛이 담겨 있다면
그건 분명, 새로운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