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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만화가가 꿈이었던 요리사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사이에서, 나만의 방향을 찾다

by 커리어포유

상진(가명)의 어린 시절 꿈은 만화가였다.

그림을 그릴 때면 시간이 멈춘 듯했다.

하루 종일 만화책을 읽고, 좋아하는 장면을 따라 그리고,

자신만의 캐릭터에 생명을 불어 넣었다.

친구들이 축구하자고 불러도, 상진은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 시간이 행복했다.

잘 그리든 못 그리든,

그림을 그리는 동안만큼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누구의 평가도 필요하지 않았다.

가장 온전하게 혼자일 수 있는 순간.

그림이 자신을 세상에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라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았다.

함께 미술을 배우던 친구들의 그림이 점점 더 정교해질수록,

상진의 그림은 어딘가 엉성해 보였다.

선생님은 조심스레 말했다.

"미술보다 다른 걸 해보는 게 어때?"

가족들도 말렸다.

"그냥 요리를 하지 그래..."

부모님이 모두 요리사였고, 옆에서 자연스레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자랐다.

서당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던가?

상진은 칼질도 익숙했고, 양념도 눈대중으로 척척 맞췄다.

명절 음식, 도시락 반찬, 가족 식사까지...

처음엔 부모님을 거드는 정도였지만

고등학생이 되고부터는 혼자서도 척척 잘했다.

그의 음식을 먹어 본 친구들은 말했다.

"와, 진짜 너는 타고난 것 같다."

"역시 피는 못 속인다니까!"

칭찬은 늘 기분 좋았다.

그래서 요리를 전공했다.

자격증도 땄고, 좋은 실습 기회도 많이 얻었다.

취업도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웠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요리를 하고 있지만 곧 그만둘 거예요."

상진은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 이유는 분명했다.

부모님이 요리사로 살아오며 겪은 고단함을

너무 오랫동안, 너무 가까이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명절에도 쉬지 못하고 일터에 나가야 했고,

무릎 통증을 참아가며 하루 종일 서서 일해야 했고,
손끝엔 아직도 화상의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상진은 알고 있었다.

그 일은 실력만으로 인정받는 자리가 아니라는 걸.

늘 누군가의 뒤에 서야 하고, 손님의 눈치를 봐야 하며,

내 이름보다는 음식의 이름이 먼저 불리는 세계라는 걸...

그래서 요리를 선택은 했지만,

오래하진 않으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주방 안에서 상진은 뜻밖의 기쁨을 마주하게 된다.

처음엔 단순히 남의 레시피를 따라 하던 요리가,
어느 순간부터 '자기 식대로' 조절해 보는 재미가 생겼다.
손님 반응을 보며 플레이팅을 바꾸고, 재료의 조합을 달리 해보기도 했다.

그런데 그 모든 과정이 왠지 낯설지가 않았다.

마치, 어릴 적 그림을 그리던 순간처럼...

그때 깨달았다.

'내가 진짜 좋아했던 건 그림 그리는 일이 아니라,

무언가를 창조하는 과정.

내 안의 감각과 아이디어를 꺼내 눈앞에 실현시키는 그 경험 자체였구나.'

상진은 그렇게 스스로의 감정을 다시 이해하게 되었다.

어릴 적 꿈이 사라진 게 아니었다.
다만, 그 꿈이 다른 모습으로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커리어코칭을 하다 보면 종종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좋아하는 일이 있는데, 잘하진 못해요."

"잘하는 일이 있지만, 재미는 없어요."

좋아하는 일이라고 해서 늘 재능이 따라오는 건 아니다.
잘하는 일이라고 해서 늘 마음이 따라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잘하는 일을 하면서 그 안에서 자신만의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면,
그 일은 분명 '좋아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단순히 직무를 고르는 기준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보여주는 나침반이 된다.

좋아하는 일이라고 해서 꼭 그 일을 직업으로 삼을 필요는 없다.

잘하는 일이라고 해서 그게 반드시 내 인생에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잘하는 일 안에서

내가 진심으로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 일은 내 삶을 '나답게' 만드는 도구가 되어준다.


나는 상진에게 물었다.
"지금은 요리하는 거 어때요?"
그는 웃으며 말했다.
"처음엔 억지로 시작했는데요.

요즘은 이 안에서 저만의 재미를 찾아가고 있어요."

나는 그 말을 오래 붙잡고 있었다.

억지로 시작한 일에서 재미를 찾는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기에.


애초에 선택은 완벽할 수 없다.

때로는 마지못해 택한 길이 뜻밖의 기쁨을 품고 있고,

기대 없이 시작한 일이 어느새 내 안의 감각을 깨우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이 길이 맞는 걸까?'라는 질문에

당장 답을 찾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망설여지더라도, 불확실하더라도,

그 선택을 믿고 묵묵히 걸어가 보길.

걷다 보면

처음엔 보이지 않았던 내 안의 감각이 깨어나고,

어느 날 문득

그 길이 나만의 길이 되어 있음을 깨닫게 될지도 모르니...


*오늘의 질문*
: 당신은 지금, 어떤 마음으로 그 일을 하고 있나요?

지금 하는 일이 당신 안의 어떤 감각을 깨우고 있는지,
그 안에 숨겨진 가치는 무엇인지,
잠시 멈춰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모든 일이 시작부터 명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선택이든 그 안에서
'나만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 길은 언젠가 당신의 방향이 됩니다.
묻고, 또 걸어가는 그 과정 속에서
당신만의 커리어 나침반은 조금씩 선명해질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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