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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왜 안 놀아?

챙김을 받던 아이가 다정함을 건네는 순간

by 커리어포유


애들 데리고 바닷가나 놀러 갈까?


33년 지기 친구와 통화를 하던 중 불쑥 튀어나온 내 말에

친구는 망설임 없이 그러자고 했다.

나는 아들을, 친구는 조카를 데리고 함께 가기로 했다.

(미혼인 친구는 조카를 친딸처럼 챙긴다.)

오빠 밖에 없는 나는 학창 시절부터 그 친구 동생과도 친하게 지냈고,

우리 셋은 자매처럼 자연스럽고 편한 사이다.

동생은 가게 때문에 시간을 낼 수 없어 대신 친구가 조카를 데리고 친구집에서 가까운 해운대 해수욕장을 가기로 했다.

그런데 갑자기 친구가 물었다.

"초등학교 6학년인 ㅇㅇ이가 두 살이나 어린, 그것도 잘 모르는 여자동생과 놀려고 할까?"

그 말에 나도 순간 멈칫했다.

둘은 아주 어릴 적에 한두 번 본 게 전부이니 사실상 '처음 보는 사이'나 다름없다.

'막상 만났는데 어색하게 각자 따로 놀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래서 슬쩍 아들에게 떠보듯 물었더니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이 돌아왔다.

"왜 안 놀아?"

그렇게 우리 넷은 태양이 유독 뜨거웠던 8월의 첫날, 해운대로 향했다.


아침부터 서둘렀지만 바닷가에 도착하니 우리보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미 앞쪽 파라솔은 죄다 점령당해 어쩔 수 없이 뒤쪽 파라솔과 썬베드를 빌려 자리를 잡았다.

구명조끼를 입는 아들에게 친구가

"ㅇㅇ아, 오늘 우리 ㅁㅁ 잘 부탁해." 라며 인사를 하자 아들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동생을 데리고 함께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아이들 노는 모습이 보이지 않아 첨엔 자꾸만 고개를 빼서 바다 쪽을 기웃거렸지만,

둘이 곧잘 노는 모습에 친구랑 나는 커피를 마시며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아이들은 물 밖으로 한 번을 나오지 않았다.

결국 아이들을 찾으러 바닷가로 나가보니, 두 녀석은 파도타기에 푹 빠져 있었다.

처음엔 각자 자기 리듬대로 신나게 놀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유심히 바라보니,

아들의 시선은 줄곧 동생을 향해 있었다.

파도가 올 때마다 고개를 돌려 동생을 살폈다.

튜브가 휘청이면 얼른 손을 내밀었고,

파도에 밀려 동생과 거리가 벌어지면

곧장 다시 그 곁으로 헤엄쳐 다가갔다.

동생 모자가 벗겨졌을 땐

물속을 헤집어 모자를 찾아 다시 씌워줬고

물을 먹어 콜록거리는 동생에게

"괜찮아?" 하고 다정하게 물었다.

아들은 마치 보호자처럼 계속해서 동생을 '의식하며' 놀고 있었다.


아들은 둘째다.

다섯 살 터울의 누나를 둔 막내.

늘 누나에게 챙김 받는 게 익숙한 아이였다.

이제는 다 컸다고 함께 놀이터 나가는 일은 없지만

어릴 적엔 같이 놀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엄마보다도 먼저 달려가 일으켜 세워주고,

운동화 끈이 풀리면 대신 묶어주고,

그네도 밀어주던 누나를 아들이 많이 의지했다.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던 딸과 달리

아들은 어릴 적부터 자신이 막내이고 싶다고 했다.

"엄마가 나보다 동생을 더 예뻐하면 어떡해?"

그렇게 말하던 아들이

동생을 자연스럽게 챙기고 있는 모습이 어쩐지 낯설고도, 기특했다.


그날 두 아이는 입수가능 시간이 끝날 때까지 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고도 아쉬운 마음에 2차로 볼링장까지 들러

무려 12시간을 함께 놀고 나서야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차에 올라탄 아들에게 물었다.

"오늘 여동생이랑 놀아보니까 어땠어?"

"재밌었어.

사실 처음엔 '오빠'라고 부르니까 좀 어색했는데...

나랑 친해지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잘 챙겨주고 싶었어."


나는 그날,

늘 챙김을 받기만 하던 아이가

누군가를 다정히 보살피는 모습을 보며

키만큼이나 마음도 조용히 자라고 있음을 알았다.


*부모 마음 처방전*

1. “괜찮겠어?” 대신 “잘 부탁할게.”
믿어주는 말 한마디는 아이에게 ‘내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구나'라는 자존감을 심어줍니다.
책임을 맡기는 건 부담이 아니라, 아이를 향한 신뢰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2.‘관계’는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입니다.
어른이 나서서 이끌지 않아도,
아이는 스스로 익숙해지고, 연결되고, 챙기는 법을 배워갑니다.
함께 어울릴 기회를 만들어주고, 자연스레 챙겨볼 수 있는 상황을 경험하게 해 보세요.
억지로 역할을 시키지 않아도, 아이는 자신의 방식으로 마음을 표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표현은, 누군가를 위한 배려로 이어지며 아이의 세계를 더 넓고 따뜻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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