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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엠제이 Apr 24. 2024

SM 물산  

지석의 배신으로 한껏 비뚤어진 향미는 악취로 인한 세상의 떠들썩함과 사람들의 호들갑이 마뜩잖았다. 그 꼴이 보기 싫어서 향미는 세상으로 향한 문을 모조리 걸어 잠갔다. 유튜브에 영상을 업로드하는 것도 그만두고, 몇 개의 영상은 비공개로 돌렸다. 그저 모든 게 귀찮았다. 작업실을 정리하고 쓸만한 건 모조리 팔아 치운 후 몇 안 되는 짐을 배낭에 욱여넣고 엄마의 집으로 향했다. 질문이 담긴 눈빛으로 입을 벌리는 미선을 향해 향미는 자신의 입술 한가운데로 검지를 세운 후 쇼가 끝났다고만 했다. 방으로 들어간 향미는 창문을 잠그고 방문도 걸어 잠근 후 며칠을 내리 잤다. 


나무가 둘러싸고 있는 잔디밭에 눈을 감고 누워있는 향미. 

등뒤의 잔디는 부드럽게 향미의 몸을 감싸고 불어오는 바람에서는 기분 좋은 나무 냄새가 난다. 편안함에 미소 짓는 향미.  

갑자기 세상을 뒤흔들 것처럼 요란한 기계음이 들리고 향미의 등에선 진동이 느껴진다. 그와 동시에 나무들이 뚝뚝 잘려 나간다. 나뭇가지가 향미를 향해 사납게 떨어진다. 떨어지는 나무를 피해 몸을 움직이려는 향미.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등 뒤의 잔디가 갈고리처럼 튀어나와 향미의 팔과 다리를 움켜쥔다. 

잔디에 잡혀있는 팔과 다리를 빼보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그럴수록 잔디는 향미를 더욱 세게 움켜쥐고 향미의 몸 위로 나무들이 무섭게 떨어진다. 자신을 향해 비처럼 쏟아지는 나뭇가지를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향미. 


소스라치며 일어나 자리에 앉은 향미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뚝뚝 떨어진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가로젓는 사이 향미의 입에서 욕이 터져 나온다. 꿈 때문에 잠에서 깨기 여러 번이라 잠을 자도 잔 것 같지가 않다. 몸은 무겁고 눈은 뻑뻑하다. 지석과 관련한 일은 모조리 과거에 묻어 두겠다고 다짐했는데, 다짐은 무의식까지 통제하지는 못하는 모양이지. 

왼쪽으로 그리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근육을 풀고 얼마 동안 한 자세로 앉아있던 향미는 별일 없이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뉴스를 뒤적이다 습관처럼 메일을 확인한다. 광고 그리고 또 광고 그리고 스팸 그리고 또 스팸. 잠든 사이에 별일 없이 세상은 돌아가는구나, 지루하다, 고 생각하고 있는데 메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냄새가 난다, 냄새가 채널 운영자님을 저희 회사에 모시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SM 물산의 박무철 상무라고 합니다.      

SM 물산에 대한 소개는 하단의 링크와 첨부하는 회사 소개서를 확인하면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유튜브에 올린 콘텐츠를 관심 있게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저희 회사가 준비 중인 제품에 운영장 님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결합하면 상호 좋은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거라고 보는데요. 

구체적인 사항은 만나서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편한 시간을 몇 개 정해서 메일로 회신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SM 물산이라. 

이 흔하고 수상한 이름은 뭐람. 삭제 버튼을 누른 후 향미는 다시 침대에 벌러덩 드러눕는다. 발가락을 까딱대며 향미는 생각한다. 새로운 제안이라. 새로운 것도 별론데 제안은 더 별로다. 향미는 당분간 벌어놓은 돈을 야금야금 까먹으며 보낼 생각이다. 그 어떤 제안도 지금 향미에겐 필요 없다. 아껴 쓴다면 얼마 동안 일하지 않아도 생활은 할 수 있겠지. 그러니 당분간은 그냥 별일 없이 조용히 보내겠다고 다짐하는데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하나가 향미의 뒤통수를 후려갈긴다. 

형편에 맞지 않게 사들인 장비들. 형편에 맞는 36개월 할부 대신, 앞으로 나아질 형편을 예상하며 3개월 할부라는 꼴값을 떨고 자빠졌던 과거 그 어느 날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향미는 깊은 한숨을 내쉰다. 곁에서 흐뭇하게 자신을 바라보던 지석의 얼굴, 덩달아 자신이 뭐라도 된 듯 기분 좋은 단꿈에 빠져있던 철딱서니 없던 그때 자신의 모습에 지금의 자신이 다가가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럴 수 없어서 향미는 욕실로 가서 얼굴에 찬물을 끼얹으며 거칠게 세수를 한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기를 두드려대니 향미에게 맞는 답이 금방 나왔다. 까먹고 자시고 할 돈이 별로 없다는 것. 이럴 때 현실 도피가 최고의 치료제임을 알고 있는 향미는 얼굴에 묻은 물을 닦아낼 생각도 않고 서둘러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는다. 향미는 지금 이 순간 그 어떤 악몽이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지금 여기보다 더한 악몽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향미는 정확히 3일 후 무철이 보낸 두 번째 메일이 반가웠다. 반갑긴 했는데 그 메일에선 묘한 협박의 냄새가 났다.  


[냄새가 난다, 냄새가 채널을 운영하고 있는 최향미 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SM 물산 박무철 상무라고 합니다.      

지난번 메일을 확인 후 삭제 하신 것 같아서 다시 메일 드립니다.  

이번 메일도 역시 삭제하시겠지요? 그렇지만 지난번과 다르게 회신은 하실 것 같군요. 그건 아마 제가 최향미 씨의 존재를 안다는 사실 때문이겠지요. 

저를 한번 만나볼 생각이 드셨다면 좋겠습니다. 자신을 드러내면서까지 유튜브를 지속할 생각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박무철이라는 사람. 그는 향미의 존재를 알고 있다. 그리고 향미가 자신을 드러내면서까지 유튜브를 지속할 생각은 없다는 것도. 마지막으로 향미가 자신에게 연락할 거라는 것까지 알고 있다. 향미는 분하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근데 어디 보자. 벌어놓은 돈은 숨만 쉬어도 야금야금 사라지는데 잠으로 현실 도피 하는 건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무철을 한번 만나보는 것도 나쁠 것 없겠다는 생각이 분한 마음을 슬슬 밀어냈다. 역시 남의 돈 먹는 게 장땡이다,라고 혼잣말을 주억거리며 향미는 무철에게 답장을 보냈다. 


향미가 답장을 보내자마자 박무철 상무는 인사치레라도 연락해 줘서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날짜와 시간 그리고 장소를 적은 메일을 보냈다. 무철은 똑 떨어지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사람이 또 일은 확실하게 하는 법이니까. 그래도 어떤 사람인지 얼굴이라도 알고 갈까 싶어 이름을 검색해 보니 몇 개의 기사가 나왔다. SM 물산은 흔한 이름이긴 해도 수상한 곳은 아닌 게 분명했다. 이름만 검색해도 관련된 기사가 꽤 나왔다. 안 걸친 데가 없다 싶은, 문어가 듣는다면 섭섭할 만큼 문어발식 사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SM 그룹이 보유한 계열사 중의 한 곳. SM 그룹의 가장 존재감 없는 계열사 중의 하나였던 SM 물산이 최근 3년 사이 고속 성장 중이라는 기사. 그리고 그 성장의 핵심 주역으로 거론되는 박무철 상무. 자신에게 메일을 보낸 사람이 꽤 높으신 양반에 일도 잘하는 사람이란 걸 알고 나니 향미는 한결 마음이 편안했다. 어떤 일을 하게 되고 얼마를 벌게 될까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계산기를 두드려대니 시간이 금세 지났다.  


비서가 열어주는 문을 열고 들어가니 군더더기 없는 책상에 앉아서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는 남자, 박무철 상무가 있었다. 팔꿈치까지 걷어붙인 셔츠와 모니터 앞에 놓인 문서와 메모지, 그리고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화이트보드. 화이트보드엔 온갖 숫자가 담긴 자료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용건만 간단히 하는 걸 좋아하는 타입인지 향미의 맞은편에 앉자마자 무철은 문서 두 개를 펼쳐 보였다. SM 물산에서 향미가 할 일이 적힌 문서와 그 일을 하는 대가로 향미가 받게 될 연봉이 적힌 문서.      


무철 : 향미 씨는 냄새에 감정을 담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냄새에 감정을 붙인다. 

향미가 할 일을 한 문장으로 설명하자면 이랬다. SM 물산이 3개월 전 출시할 [BREATH]의 다음 제품을 준비하는 일. 첫 번째로 출시된 ‘사랑’ ‘용기’ ‘희망’을 이을 다음 감정 아니 제품을 생산하는 것. 예를 들면 ‘설렘’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적합한 냄새를 찾거나 냄새와 연결할 감정을 찾는 것. 이것이 앞으로 향미가 할 일이라고 했다. 무철이 내민 다른 문서의 연봉 액수는 며칠 전까지 향미가 두드린 계산기에 있던 어떤 숫자보다도 컸다. 그 말인즉슨 이 일을 향미가 확실하게 그리고 제대로 해내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향미 : 솔직히 약간 사기 같긴 하거든요? 근데 제가 또 사람들한테 많이 듣는 말 중에 하나가 ‘사기 치지 마’ 라서. 그런 거 보면 제가 잘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네요. 


향미의 말에 무철은 잠깐 웃었다.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웃는 무철의 모습이 잠깐 편안해 보였다. 예상보다 덜 싹수없는 무철의 태도와 예상보다 훨씬 만족스러운 연봉 제안 그리고 앞으로 하게 될 일에 대한 호기심으로 향미는 무철이 알려준 날짜에 맞춰 SM 물산에 출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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