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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엠제이 May 01. 2024

배신의 냄새, 무철

스탠드 조명 전구의 주광색 불빛이 고백을 유도하는 것처럼 책상 구석에서 조용히 빛난다. 오가는 사람들이 만드는 움직임과 말소리가 멈춘 텅 빈 SM 물산 건물에서 무철은 자신의 사무실 책상에 우두커니 앉아있다. 비로소 혼자가 되는 시간, 이 적막과 고요가 무철을 편안하게 한다. 책상 위로 손을 뻗은 무철은 [BREATH-설렘]을 공기 중에 뿌린다. 공기 중으로 퍼지는 작은 물방울들 그리고 주변으로 내려앉는 냄새들. 무철은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 

과연 이 냄새는 무철을 설레게 하는가. 무철의 대답은 물음표. [BREATH-설렘]을 시향지에 묻힌 후 코 가까이 가져가 숨을 들이마신다. 과연 이 냄새는 무철을 설레게 하는가. 무철의 대답은 역시 물음표다. 무철은 [BREATH-설렘]과 시향지를 내려놓고 노트북으로 손을 뻗는다. 노트북 화면에 [BREATH-설렘]의 성분과 테스트 결과가 숫자로 질서 정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과연 이 냄새는 무철을 설레게 하는가. 그래프와 숫자를 보면서 무철은 확신한다. 그렇다. 숫자와 그래프가 무철의 마음속에 설렘이라는 감정을 은은히 퍼트린다. 숫자는 거짓을 말하는 법이 없다. 더하면 더해지고 빼면 빼지고 나누면 나눠지고 곱하면 곱해진다. 복잡할 것도 의심할 것도 없다.


그 여름 놀이터에서 무철에게 기다리라고 한 후 떠난 어머니가 함께 놀던 친구들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는 밤까지 돌아오지 않았을 때, 놀다 지친 무철은 바닥에 숫자를 적었다. 열 살 무철이 알고 있는 숫자와 수식이 거의 바닥 나서 이제는 어머니가 자신을 데리러 와줬으면 하고 간절히 바랄 즈음, 퉁퉁 부은 얼굴과 벌게진 눈을 한 어머니가 뛰어와 자신을 안았다. 얼마 동안 무철을 품에 안고 울던 어머니가 손에 쥐고 있던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철의 손을 세게 잡고 큰엄마 집으로 가자고 말하는 어머니의 발밑에서 무철이 공들여 적어 놓은 숫자가 뭉개지고 흐려졌다. 

처음 만나는 큰엄마라는 사람 앞에서 무철은 주눅이 들었다. 그런 무철을 향해 고개를 들라고 말 한 어머니는 큰엄마라는 사람을 향해 조용히 무철을 키울 수 있도록 돈을 달라고 했다. 이어서 거센말이 어머니와 큰엄마 사이를 오갔다. 어머니가 고개를 들라고 했기 때문에 무철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런 자신의 눈을 보면서 큰엄마는 그 어미에 그 아들이라고 했고 무철은 그런 당연한 말이 우스워서 잠깐 웃었다. 그 순간 어머니의 얼굴을 향해 손바닥이 날아들었다. 휘청이다 바로 서는 어머니의 한쪽 뺨이 하얗게 질리는가 싶더니 벌겋게 부어올랐다. 그 얼굴을 손수건으로 감싸 쥐고 어머니는 무철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자신이 괜찮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무철도 어머니를 향해 이빨을 보이며 웃었다.

큰엄마에게 받은 돈으로 어머니는 무철과 둘이 살 수 있는 집을 구했다. 어린 무철은 큰엄마라는 사람이 돈은 많은 사람이나 보다 생각했다. 큰엄마라서 큰집에 사는 건가. 


먹고살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무철은 송충이처럼 솔방울만 먹고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무철과 어머니 모두 시간을 쪼개 일을 했지만 딱 살아질 만큼만 돈이 벌렸다.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가며 일을 해도 어제보다 오늘은 손톱만큼도 나아지지 않았다. 벌겋게 부어오른 얼굴로 무철을 향해 눈을 찡긋했던 어머니는 이제 눈을 감고 뜨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퍼석한 어머니의 얼굴을 볼 때마다 무철도 어머니를 마주 보며 활짝 웃지 못했다. 그저 분단위로 반복되는 또 다른 하루 그리고 하루를 허덕이며 살았다.   


두 번째로 만난 큰엄마라는 사람을 군말 없이 무철이 따라 나선건 그래서였다. 하교 후에 무철은 패스트푸드 점으로 아르바이트를 가는 대신 집으로 가서 가방 하나에 몇 개 안 되는 옷가지를 넣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왔다. 낡고 허접한 집안 살림을 등 뒤에 남겨두고 나오는 그 길에서 무철은 늦은 밤 놀이터로 자신을 향해 달려온 어머니처럼 다시 이 집으로 돌아올 일은 없을 거라고 다짐했다. 어머니도 열 살 난 무철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을 마냥 기다리지 않았으면. 

엄마의 뺨을 후려갈긴 큰엄마의 큰집에 가서 안락함을 얻은 대신 무철은 다달이 더 나은 시험점수, 더 나은 등수, 더 나은 능력을 보여줘야 했다. 먹고살기 위해 돈을 버는 대신 더 나은 결과를 낼 수 있는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했다. 돈을 버는 일에 비해 딱히 더 어려울 것도 없었다.      


노트북 전원을 눌러 끈 후 무철은 주머니에서 낡은 손수건 하나를 꺼내 코로 가져가 냄새를 들이마신다. 여기선 무슨 냄새가 나는가. 신뢰하는 숫자와 도표가 없는데도 무철은 답을 알 것 같다. 여기선 배신의 냄새가 나겠지. 이 손수건에선 어머니를 배신한 자식의 냄새가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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