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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Nov 20. 2020

소화시킬 겸, 밤 산책

물건 <자동차>

 어제 운동을 하고 나오는데 헬스장 입구에 흰색 그랜드 카니발 한 대가 바짝 대 있었다. '에이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차를 댄 거야.' 별안간 무슨 이리도 큰 차를 타나 싶었다. 내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뭔가를 가진 삶이겠지. 그렇게 많은 것을 담는 삶엔 특별한 게 있으려나. 새로 산 차인지 먼지 한 점 없이 광택이 번쩍거렸다. 흰색이 아니라 거의 거울에 비친 햇볕처럼 광이 났다. 그 옆에 세워둔 내 허름한 차는 흰색인데도 어두웠다. 희면서 어두울 수 있다니. 아무리 씻겨도 전만큼 희지 않고 더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늘 흰 유니폼을 더럽히는 1번 타자 추신수의 유니폼처럼 얼룩덜룩해 보인다. 처음 차를 뽑았을 땐 독특한 색을 고르려고 했다. 벌겋고 퍼런 그런 색 있지 않나. 누가 보면 '오 색깔 정말 이쁘다. 되게 강렬한 색이네.' 그런 말을 한 번쯤 할만한 걸 찾았다. 근데 딜러가 하도 만류해서 결국 평범한 흰 차로 샀다. 중고차를 팔 때 좋고, 질리지도 않으며 가격마저 더 싸다고 날 부추겼다. 한 푼이 궁했던 나는 그냥 프로모션이 가장 센 흰색 차로 주문했다. 처음 세차했을 땐 저 그랜드 카니발처럼 희고 예뻤었는데. 너를 때 묻힌 사람이 누구니. 나는 그런 적 없다 얘.


 딜러에게 차 키를 건네받고 처음 거리로 나섰을 때를 기억한다. 분명 긴 시간 고민해서 산 차였음에도 희미한 낭패감이 들었다. 다들 흰 차만 타나 싶을 정도로 도로 곳곳이 하얬다. 어쩐지 새 차를 받고도 지금까지 살아온 바와 별다른 게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특별한 삶을 바란 건 아니지만 어쩐지 신나지 않았다. 광고에서는 ‘당신의 특별한 인생을 위한 특별한 차’라고 강조했지만, 내가 타니 차까지 덩달아 무난해져 버린 기분이었다. 얼마 전 책에서 읽은 바로는, 제 자식 이름을 특이하게 짓는 부모는 대체로 평범하게 살아온 중산층이라고 한다. 그들은 일종의 보상심리로 아이들에게 특별한 삶에 부여하기 위해 특이한 이름을 짓는다. 아이를 고통에 몰아넣는 기상천외한 이름도 특별함을 위해 감수하는 것이다. 자신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주길 바라는 열망이 비이성적인 작명으로 표출된다는 건 내게 좀 섬뜩하게 들렸다. 내 자식만큼은 나와 다른 특별한 인생을 살길 바라는 흰 와이셔츠에 체크무늬 넥타이를 맨 샐러리맨. 그 간곡한 마음은 구청 직원의 난감한 표정으로 드러나지만,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온화한 표정의 아내. 입학 첫날부터 출석부를 받아 든 짓궂은 담임선생의 놀림으로 시작된 스트레스가 아이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차를 고를 때도 비슷했다. 내가 시뻘건 차를 탄다고 열정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빨간 드레스를 입은 여인처럼 원색적인 차를 타고 도로를 뚫고 나가는 나를 상상했다. 늘 평범했던 나는 그렇게 흰둥이 폭스바겐 골프와 오 년 넘게 동고동락했다. 예상대로 잔고장 하나 없이 평범한 일상을 구가했다. 생각보다 애틋한 추억을 남겼고, 내 차를 좋아해 준 그녀의 미소를 보았다. 아침에 그녀를 집에 내려주고 돌아서는 희미한 기쁨이 지금도 조수석에 담겨있다.


 사실 처음 차를 고를 때 떠올린 건 검정 차였다. 나와 어울리는 색이라고 생각했다. 다 결정하고 가족들에게 말했을 때 가장 반대했던 건 형이었다. 그건 아저씨나 타는 색이라고, 그거 타고 다니면 세차도 엄청나게 자주 해야 한다고. 밥상머리에서 밥풀을 튀기며 반대했다. 본인은 정작 검은 차를 타고 다니면서도 그런 소리를 했다. 귀가 백지장처럼 얇은 나는 입을 비쭉 내밀고도 결국 흰 차로 골랐다. 내심 어둡고 침침한 내게 밝은 외피를 씌우면 좀 더 긍정적으로 변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옷장을 열면 은연중에 내가 그런 보상심리로 흰색 옷을 사들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흰색 라코스테 피케셔츠가 넉 장 있고, 운동복도 대부분 흰색이다. 영화나 책은 어두침침한 것만 좋아하면서도 옷은 흰 걸 고른다. 아이폰도 흰색이고, 프로틴 쉐이커도 흰색이다. 매일 그 시커먼 커피를 들이부으면서도 얼굴엔 백탁 크림을 바르고 외출한다. 단백질 보충을 위해 흰자만 먹고, 백열등 아래에서 맥북으로 백지에다가 검은 글자를 때려 박는다. <그것이 알고 싶다>를 매주 보면서도 추리소설보다는 순수 문학을 더 좋아한다. 우울과 몽상에 시달릴 때면 흰 우유를 마시고 흰 시트에서 눈을 감는다. 때가 타지 않도록 주의하지만 늘 누레지는 흰옷은 자주 빨아야 하고, 빛이 바랜 내 일상도 마음을 고쳐먹어야 기어코 하얘질 수 있을 것이다.


 가끔 밤 산책을 하며 동네 가로수 길을 걷는다. 하나의 얼굴, 하나의 생각을 찾아 떠돈다. 오래전부터 추구해 온 몇몇 가지를 잊었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그런 것들이 주로 글감이 되곤 했다. 좀 걷다가 보면 내가 좋아하는 작은 공원이 나온다. 거기엔 온갖 이들이 매달렸을 철봉들이 줄이어 박혀있다. 나는 스쳐 지나가지 못하고 광배근을 자극하며 땀을 적신다. 오늘 우리 동네 가로수 길엔 잎이 떨어져 있었고, 흰빛과 어둠이 늘어선 묘한 광경이 펼쳐져서 예뻤다. 난 뭐라도 홀린 듯이 명암이 뒤섞인 시공간을 즐겼다. 흰색과 검은색이 묘한 광경을 자아냈다. 어두컴컴한 공원을 비추는 가로등과 네온 속에 가리어진 하늘이 날 사로잡았다. '아 이 맛이 밤 산책이지.' 밤은 책이고, 밤은 역시 낭만이구나. 파트리크 모디아노의 소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가 떠올랐다. 제 정체를 찾기 위해 어둑한 파리의 골목골목을 쏘다니는 탐정 '기 롤랑'이 된 기분이었다. 기억상실에 걸린 그는 몇 장의 사진과 누군가의 진술로 자신의 정체를 찾아내려고 무던히 애를 쓴다. 그 과정에서 나처럼 도시를 부유하는 이미지를 구경한다.


 곧 자정 무렵이었다. 인적 드문 공원을 막 빠져나오는데 오늘 낮에 봤던 흰색 그랜드 카니발이 공원 입구를 막고 서 있었다. '아니 이 큰 차를 왜 대체 입구에 세우는 거야.' 오늘 나를 두 번 가로막은 저 차는 오밤중에도 참 번쩍였다. 도시가 지나치게 밝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암의 비율에서 암이 전적으로 우세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치안을 중시하는 이 도시는 명을 추구한다. 그건 꼭 내 바람과 다른 삶의 형체 같아 보였다. 집으로 가는 길에 한기가 느껴져 몸을 잔뜩 옹크렸다. 땀에 젖은 몸을 대충 적시고 흰 시트에 몸을 뉘었다. 종일 커피를 너무 마신 탓인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아마 난 직장을 그만두면 야행성 동물처럼 살 거다. 최대한 밤과 새벽을 많이 누리는 일상. 오밤중에 쏘다니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밤마다 문학을 펴는 삶. 침대 귀퉁이에서 레일라 슬리마니의 <달콤한 노래>를 펴서 읽기 시작했다. 의식이 몽롱해서 이런저런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지만 상상하느라 바빠지고 책은 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난 어떨 땐 시간을 분 단위로 아껴 쓰면서, 새벽만 되면 시간을 물처럼 콸콸 틀어 쓴다. 프랑수아즈 사강은 첫 남편과 이혼할 때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새벽 4시에 잠자리에 들고, 그는 아침 7시에 일어나 말을 타러 간다. 결정은 내려졌지만, 난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생활을 계속할 수 없었다." 나처럼 밤늦은 시간을 좋아하고 주말이면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잠을 자는 사람은 이른 아침에 커피 한잔을 하며 사색을 즐기는 사람과 살긴 어려울 것 같다. 내가 새벽에 깨어 있을 때 곤히 자는 사람이라면 난 그를 외롭게 할 테니까. 어둠을 검게 칠한 천장에 기억의 잔상을 늘어놓고 회한에 빠지다 곤히 잠든 그를 멀리할 테니까. 어둠 속에서 익숙한 냄새를 맡고 뒤섞인 열기에 더할 나위 없어 몸을 비비던 시간이 떠올랐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시간을 견디는 것뿐이다.


 맥북을 켜고 그에게 보여주려던 몇몇 글을 정리해서 메모장에 옮겨 적었다. 덧없고 변하기 쉬우며 불안정하고 미묘한 감정이라 마음을 다 꺼내지 못했다. 불확정성의 원리처럼, 근사치만 있고 참값은 존재하지 않는 글이었다. 사실 근사치에도 가닿지 못해 꼴이 영 시원찮았다. 글 속에서 나는 유럽에 머문다. 지구 반대편에서 살았던 그 시절이 그립다. 남쪽 어느 휴양도시 해변에 앉아서 미소 짓는 나. 사람 몸의 세포는 7년이면 전부 다 사라지지만, 오직 기억만큼은 남겨져 있다. 내 생에서 가장 밝았던 그 시간은 지워지지 않을 터다. 바닷가에 한참을 머물던 나는 어린 소녀가 황혼 녘에 어머니 부름을 받는 걸 지켜본다. 해변에서 돌아오는 녀석의 걸음은 무겁고 더디다. 난 그 느린 걸음에 눈을 떼지 못한다. 아이는 계속해서 더 놀고 싶었기에 떼를 쓴다. 서럽게 울며 어머니를 원망한다. 모녀는 벌써 길모퉁이를 돌아 어두운 골목으로 빠져나갔다. 그들은 거의 빛에 가까운 흰색 그림자를 등지고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 투명에 가까운 흰 바다에 노을이 비친다. 난 내 삶 또한 저 아이의 서러움만큼 느닷없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건 아닐까. 좋았던 시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쉽게 스치고, 매일 혹독한 아침이 찾아온다. 그렇게 늦게 자니 당연히 일어나기가 힘들지. 이런 생각을 글로 적다가 한참이 모자라 보여 임시저장 버튼을 누르고 다시 어둑한 침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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