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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Sep 15. 2021

하루키처럼 뛰고 싶어

소재 <러닝>

 며칠 전부터 등에 담이 생겨 통증이 가시질 않는다. 운동을 마쳤을 땐 미세한 삐걱거림에 불과했는데 이젠 내 의식을 통째로 삼켜버린 듯 욱신거린다. 마음이라는 게 참 이상해서 몸이 아프니 생각도 흐트러진다. 난데없는 무기력과 우울은 등허리 어디쯤 들러붙어 요지부동이다. 막 들고 나온 따끈따끈한 신작 소설에도 좀처럼 손이 안 가고, 목전에 다다른 일만 처리하기 바쁘다. 마치 시시포스가 받은 형벌처럼 큰 돌덩이를 들고 오르내리는 기분으로 산다. 줄줄 새는 잡념은 검은 타르처럼 생각의 점이지대를 무너뜨리고, 식욕만 들끓어 치킨을 당의정 삼아 버틴다.


 한때 내 여름날을 적셨던 친구는 '생각하느라 바쁘다'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그땐 미처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말을 지금에 이르러서야 이해한다. 몸에 살이 붙는 게 확연해지자 궁여지책으로 퇴근 후에 효창공원을 걷다 집에 간다. 그렇게 한참을 걸으면 땀으로 등이 축축해지고 조금 살만한 기분이 든다. 꼬리를 무는 생각을 하나씩 정리해내며 머리가 개운해진다. 프랑스 사회학자 다비드 브르통은 산문 <걷기 예찬>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걷는다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발로 걸어가는 인간은 모든 감각기관의 모공을 활짝 열어주는 능동적인 명상으로 빠져든다. 걷는다는 것은 잠깐 혹은 오랫동안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작가는 최대한 느리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현실적 고민과 공상을 아우르며 자신을 성찰하는 수단으로 걷기를 택한다. 발을 떼고 어디론가 향하는 그 자체로 얻어지는 마음에 주목한다. 나는 다비드 브르통의 멋들어진 문장을 노트에 적어놓고 공원을 걷는 나를 한껏 추켜세웠다.


 난 대체로 운전을 해서 출근한다. 꽉 막힌 여의도를 통과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시동을 건다. 출근길은 가장 마음이 약한 시간이라 그런지 차 안에서 듣는 라디오가 달콤하다. 아침부터 지하철과 버스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출근하면, 일과 시작도 전에 지쳐버린다. 고요한 차 안에서 커피를 마시며 좋아하는 음악을 흥얼거리는 기분을 떨쳐내지 못한다. 하지만 구원이 없는 차로에 갇히면 금세 운전대를 잡은 걸 후회한다. 골목이 비좁아 주차가 번거롭다 보니 잠시 쉴 수도 없다. 운전대를 한 번 잡으면 사냥개처럼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 채 앞만 봐야 한다. 조금 방심할라치면 먹잇감이 불쑥 튀어나오고, 난 순수한 분노를 뽐내며 욕설을 뱉는다.


 출근길 혼돈을 비껴가려고 요즘엔 그냥 걸어서 출근한다. 꽤 긴 시간이 걸려도 서두르지 않고 걷고 또 걷는다. 도시는 걸을 때 살만한 장소로 탈바꿈하니까. 요즘처럼 선선한 날씨에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꽉 막힌 차로를 굽어본다. 걸을 때야 비로소 보이는 게 있다. 하루키는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달리기에 관해 이런 말했다. “때때로 매일 달리고 있는 사람을 보고, ‘그렇게까지 해서 오래 살고 싶을까’하고 비웃듯이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오래 살고 싶어서 달리고 있는 사람은 실제로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설령 오래 살지 않아도 좋으니 적어도 살아 있는 동안은 온전한 인생을 보내고 싶다’라는 생각으로 달리고 있는 사람이 수적으로 훨씬 많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걷기는 달리기와 비슷해서 시간을 온전히 느낄 수 있게한다. 그건 비단 건강을 관리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내 육체가 현현할 수 있도록 시공간을 주무르는 기분을 손에 쥔다.


 4년 동안 노량진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던 내 친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매일 일류강사의 인터넷 강의를 듣고, 아침부터 줄을 서서 줄줄이 이어진 강의를 목 빠지라 듣고 있노라면 내 생각은 발을 디딜 틈이 없어진다고. 암기와 이해의 과정에서 얻어지는 건 누군가의 가르침이지, 능동적인 사고는 아니라고. 난 녀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고시원 쪽방은 머리 하나 들어가기 어려운 창문뿐이다. 누군가의 사상을 끊임없이 주입하는 기계 같은 삶에 공상이 깃들 리 없다. 녀석은 곱창을 격렬하게 씹으며 아이작 아시모프의 단편소설 속 사이보그가 된 것 같다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 친구는 이제 작년 한 소도시의 공무원이 되어 노량진을 잊고 산다. 요즘은 그토록 원했던 생각이란 걸 하고 살까.

 누군가를 존경하고 그의 사고방식에 동조하게 되면 그 앞에서 엇나가는 생각을 하기 어렵다. 녀석에겐 족집게 강사가 그랬고, 내겐 몇몇 작가가 생각의 갈피를 낚아챘다. 작가 ‘올더스 헉슬리’는 66번의 반복이 진실을 만든다고 했다던데, 내 생각에 누군가의 글을 반복해서 읽으면 그의 생각에 푹 빠질 수밖에 없다. 그건 맹목적인 구석이 있어서 그가 가진 사고의 틀에 나를 맞추게 된다. 스스로 사고를 할 필요가 없기에 편하다. 때론 눈뜬 이의 장광설도 성경의 한 구절처럼 ‘오 지저스’ 하며 받아들인다. 난 그걸 텍스트의 주술과 같은 힘이라고 믿는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한때 날 사로잡았던 사람이다. 한때 그의 에세이와 소설이 자아낸 장력 안에 기거했다. 누군가 전작주의(全作主義)에 관해 묻는다면, 나는 하루키 작품을 끼고 살았던 스무 살 무렵을 떠올린다. 처음 소설에 재미를 붙일 무렵엔 서늘한 도서관 귀퉁이에서 하루키 소설을 읽었다. <상실의 시대>, <해변의 카프카>로 처음 두꺼운 책을 떼는 맛을 알았다. 소설을 읽을 만큼 읽자, 마약 같은 에세이가 눈에 들어왔다. 작가라는 직업을 위해 하루키가 취한 삶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중 가장 눈에 띄었던 건 하루키가 가진 조깅에 대한 애착이다. 그는 군살 없는 몸매에 대한 환상이 있다. 성적 취향은 다분히 유아적이라 프로이트와 칼 융을 들먹여야 할 정도로 원초적이지만, 조깅을 향한 태도는 다분히 청교도적인 구석이 있다. 매일 똑같은 패턴에서 권태롭기보단 오히려 그는 사사로운 일에 끝없이 의미를 부여하며 나아간다. 조깅이 가진 매력을 책 한 권에 포개 넣을 수 있다는 건 실로 가공할만한 확대 해석 능력이다. 그의 다른 책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의 취향 하나하나를 근사하게 설명해낼 수 있는 사람이다. 쾌락과 환락에 찌든 도시인은 그의 에세이를 읽으며 경외를 품는다. 내 보잘것없는 삶도 그의 말처럼 의미심장해질 수 있다면 그건 종교적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을 수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절대 흘리지 않는다. 흔한 SNS도 하지 않고 대외활동도 뜸하다. 그는 오직 글쓰기로 자신을 반영한다. 하루키는 어쩌면 작가로서 궤도를 이탈하는 모든 행위를 경멸하는지 모른다. 이 정도 명성이면 어쩔 수 없이 삑사리를 낼 만한데, 그는 여전히 조깅이나 하며 산다. 영향력을 가지면 그걸 쓰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인데, 하루키는 고양이나 관찰하며 자족한다. 그건 어떤 의미에서 존경할만한 자제력이지만, 다른 의미에서 하루키라는 사람 자체가 일상에서 쉬이 벗어나지 않는 샐러리맨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온 세상이 그를 강력한 노벨상 후보로 치켜세우고, 책을 내기 전부터 한국에서 백만 부 이상 팔아치우지만, 그의 스피커는 끝내 울리지 않는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루키를 이해할 수 있는 작은 책이다. 하루키는 평생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만 써왔다. 군중과 몇 발자국 떨어진 외로운 남자의 이야기. 이 책엔 달리기를 통해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 일상인 하루키가 보인다. 누구의 말처럼 어떤 소설가는 평생 한 편의 글만 쓰는지도 모른다. 제목이 각기 다르고 전혀 다른 세상을 이야기해도 뿌리가 같은 이야기에 불과하다. 하루키의 책은 늘 다른 소재를 다루지만, 거기엔 작은 체구로 어딘가를 비척거리며 뛰어다니는 남루한 행색의 남자가 있다.

 

 그는 새벽에 일어나 조깅을 한다. 오전엔 네 시간가량 글쓰기에 열중하고 식사는 늘 생선이나 채소 샐러드를 즐긴다. 그는 작업이 일찍 끝났다고 펜을 내려놓는 사람이 아니다. 그에겐 무엇보다 정량의 글자를 새겨 넣는 의식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른 오후엔 독서는 하고, 밤이면 늘 앉던 소파에서 재즈 스탠더드 연주곡을 즐긴다. '존 콜트레인' 보다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격렬한 연주법에 호감을 느낀다. 술도 좋아해서 위스키, 와인, 맥주 가리지 않고, 소파 옆엔 얌전한 고양이가 목을 긁고 하품을 한다. 하루키는 교토 외곽에 살며 도시 속 개츠비의 화려한 삶과는 거리를 둔다. 그는 상상을 초월하는 부자지만, 저녁 시간은 언제나 텅 비어있다. 그가 구축한 리듬이란 매일매일 똑같이 여전히 그대로이다. 시계를 보니 이제 저녁 9시다. 저물어가는 겨울밤은 얼마 못 가 자취를 감춘다. 놀랍게도 그는 벌써 잠자리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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