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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09. 2021

운동의 주적은 라면

음식 <라면>

 부엌 찬장에 있는 라면 한 봉지가 문제다. 난 늘 붉은 봉투 안에 담긴 튀기지 않은 면과 액상 수프에 사로잡힌다. 면만 딱 건져 먹으면 깔끔할 것 같다고 타협에 들어간다. 국물을 마시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날 설득한다. 게다가 저녁에 운동도 열심히 했으니 먹을 자격이 충분한 거 아닌가. 근데 시계를 보니 벌써 자정에 가까워졌다. 며칠 전부터 샤워하기 전에 심각한 표정으로 내 복부를 노려보지 않았나. 젊은작가상 수상집을 바닥에 깔고 거기에 라면 냄비를 얹으면 나 자신을 경멸하게 될 것이다. 이 시간에 라면이라니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난 도리질을 치며 다시 넷플릭스로 눈을 돌렸지만 허기가 정신을 지배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자꾸만 라면 끓는 영상이 머릿속에서 되감긴다. 티아라의 훅송처럼 떨쳐낼 수가 없다. 내 전두엽 위에서 용암처럼 붉게 보글거리는 냄비가 속을 쓰라리게 했다. 나는 저항도 못 하고 앓는 소리만 냈다. 머릿속으로 물을 끓였다가 싱크대에 부어 버리기를 반복했다. 냉동실에 가득 찬 닭가슴살은 냄새조차 맡기 싫은데 왜 라면은 떨쳐낼 수가 없을까. 어떻게 하면 잊을 수 있을까. 애초에 왜 사다 놨을까. 이런 안일한 태도가 날 인스턴트하게 만들었다. 일하거나 글을 쓸 때도 허겁지겁 마감 시간에 맞춰 가까스로 해내지만, 정작 미묘하고 섬세한 부분은 놓칠 때가 잦다. 어쩌면 라면은 하나의 기호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내 일상 전반에 널리 퍼진 안일함을 내제 한 적색경보.

 

 밤을 습격하는 허기는 지병처럼 날 따라다녔다. 나이를 먹어도 어느 욕구 하나 잠잠해지지 않는데, 그중에서도 식성은 안하무인이다. 나도 새침하게 요즘 따라 입맛이 없다며 쉬이 수저를 내려놓고 싶다. 밥그릇을 싹싹 비우는 동료를 뒤로하고 먼저 나가 있겠다며 조용히 속삭이고 싶다. 커피를 시켜 놓겠다며 유유히 자리를 뜨며 슬며시 미소 짓는다. 난 입이 짧아서 많이 못 먹으니 너희들은 천천히 먹으라며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식당 문을 열면 어떨까. 아침 출근길엔 아메리카노 한 잔이면 족하고 저녁이면 사과 반쪽만 먹고도 스무 매 가량의 글을 야무지게 써내는 사람이고 싶다. 난 여전히 식당에 가면 이성을 잃고 유달리 열심히 먹는 사람이다. 가끔 야만적으로 느껴질 만큼 과도하게 먹는다. 식욕과의 지긋지긋한 싸움을 끝낼 때가 온 것 같다.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 


 며칠 전에도 밤늦게까지 허기에 시달리다 라면을 떠올렸다. 운동의 적은 게으름이 아니라 라면이다. 유튜브만 틀면 다들 라면 먹방을 하고 있다. 간혹 유튜브 먹방 콘텐츠는 죄다 농심이 제작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유튜브 로고도 농심처럼 빨갛지 않나. 빨간 건 사과가 아니라 라면 국물 아닌가. 분명히 나는 운동 유튜버 채널에 들어갔는데, 그들은 조회수를 위해 라면 먹방을 감행한다. 큰맘 먹고 운동 자극을 받으러 온 사람에게 라면이라니. 특히 새벽은 누구에게나 취약한 시간이라 보글보글 끓는 라면을 참아낼 재간이 없다.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저도 모르게 전화통을 붙잡게 되는 새벽이야말로 지극한 라면의 시간이다. 머릿속에서 라면을 먹어야 할 이유가 엑셀 시트처럼 착착 정리되는 게 느껴졌다. 마의 새벽 두 시를 넘기자 더는 버티지 못하고 가스레인지에 물을 올렸다. 시간의 잔해가 나뒹구는 황량한 벌판에서 라면 국물로 체온을 유지했다. 그러니까 라면은 도통 잠을 이루지 못한 나를 위한 극약처방이었다. 불면증으로 신경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받았어도 처방전에 신라면 한 봉지라고 적어줬을 것이다. 뜬눈 사이로 스며드는 고독을 잊기 위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라면은 불완전한 식품이라 늘 단백질 함량에 신경을 쓴다. 그래서 칼로리 상관없이 달걀 두 알에 참치캔까지 마구잡이로 투하한다. 버거킹을 더블 패티로 시키면서 다이어트 콜라를 주문하는 것처럼 라면을 먹을 때도 마음의 위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젓가락을 들면 이성을 잃고 우리 강산을 푸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허기를 지우기 위해 국물마저 다 마셔버린다. 입이 짜니 사과까지 깨물어 먹고 나면 비로소 다자이 오사무가 왜 자기가 공들여 쓴 멀쩡한 소설을 '인간실격'으로 명명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카톡을 하던 친구는 그거 먹는다고 달라질 거 없다고, 뭘 그렇게 고민하냐며 따져 물었다. 그래 나도 안다. 라면 한 그릇 먹는다고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 근데 난 배에 기름이 차면 목숨보다도 명예를 중히 여기는 사무라이처럼 할복할지도 모른다. 결혼한 내 친구 병석이는 매일 야식을 달고 살지만, 난 녀석과 선을 긋고 날렵한 체형을 유지할 생각이다. 결혼식장에서 탕수육을 산처럼 퍼놓고 본전 뽑겠다고 처묵처묵하는 녀석과 같아질 순 없다. 난 아직 배 나온 아저씨가 될 생각이 없으니까. 여기서 물러설 생각은 없다. 


 난 엄연히 작가니까 배가 나오면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존경하는 작가들은 죄다 삐쩍 말라있다. 그들은 술 냄새를 풍기며 글을 쓰다가 간혹 각혈을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이미지에 가깝다. 헐렁한 남방을 입고 김치에 소주를 마시는 게 더 어울려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쉴 새 없이 커피를 들이켜야 한다. 늘 빈속에 커피를 마셔서 위산 분비가 불규칙해진 탓에 속 쓰림에 시달리는 것이 내가 가진 왜곡된 작가상이다. 피폐한 얼굴로 병든 낭만주의를 찬양하는 작가이고 싶다.   


 이런 잡생각에 시달리면서도 결국 오늘 밤은 굶고 자기로 했다. 오늘은 결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내 서른여섯의 봄을 이렇게 져버릴 수는 없으니까. 고작 천 원짜리 기름에 튀기지 않은 건면 따위에 내 자존심을 굽히지 않으련다. 이제 곧 셔츠의 계절이 올 것이다. 작년까지 입던 맞춤 셔츠가 작아졌다. 그게 다 얼마 짜린데 벌써 당근 마켓에 뺏길 순 없다. 그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배가 덜 고픈 것 같다. 그래 모든 게 다 정신력 싸움이다. 그래 민진아, 넌 지금 외로워서 먹으려는 거야. 왜 고독을 국물로 달래려고 하니. 넌 문학으로 달래야 하잖아. 저기 쌓아놓은 책만 봐도 배부르지 않니. 운동의 주적은 라면이라는 거 아직 모르겠니. 난 내 속의 허기를 대화를 통해 진정시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미각은 너무 무디다. 이른 취업으로 혼자 살면서 배달 음식에 익숙해졌다. 바깥 음식에 들어가는 맵고 짠 조미료에 혀가 둔해졌다. 예술을 감상할 때도 미감이 무디면 미세한 차이를 무시하게 된다. 감식안에 백태가 끼면 자꾸 소금을 치게 마련이다. 그러니 허구한 날 지구를 때려 부수는 블록버스터에 열광하는 것도 당연하다. 안정된 구도에 익숙해진 나는 뭘 보든 쉽사리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원색으로 처바른 빨간 신라면 봉지는 내 돌덩이 같은 미감을 깨부수는 마약과 같다. 취향도 신경 써서 관리하지 않으면 군살이 붙는데 혓바닥이라고 다를 게 있을까. 


 글을 쓸 때 종종 독한 어휘에 의지한다. 위악과 냉소를 무기처럼 휘두르며 스트레스를 푼다. 끓는 라면처럼 얼얼한 문장이 부끄러워서 지운 적도 많다. 소재주의 함정에 빠지는 일은 생각보다 자주 발생한다. 읽히고 싶어서 쓴 글이지만, 읽히면 부끄러워지는 글이라니. 내가 지향하는 바는 미세하게 변하는 하루를 공들여 쓰는 글이다. 상소리가 나올라치면 호흡을 가다듬고 알프스 산맥에 자리한 융프라우를 거니는 상상으로 마음을 어휘를 하나하나 정화한다. 눈을 비빈 후에 단어를 깁고 더해서 별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소소한 재미가 있는 글을 써내고자 한다. 음식을 예를 들면 화려한 궁중요리보다는 담백한 초밥이 좋겠다. <미스터 초밥왕>의 쇼타가 만든 연어알 초밥처럼 밥알 하나하나에 생명력이 붙어있는 글이면 어떨까. 재료 본연의 신선도를 중시하고, 장인의 솜씨에 따라 맛이 미세하게 변하는 그런 경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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