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민진 Jan 17. 2021

운동하는 사람은 블랙, 일하는 사람은 밀크

음식 <커피>

ᅠ요즘 부쩍 편의점 커피를 마신다. 아침에는 늘 시간이 촉박해서 커피를 끓일 생각은 못 하고, 속 끓일 거 없이 건물 1층에 자리한 세븐일레븐에서 커피를 산다. 개울가에서 수통을 채운 병사의 심정처럼 고단하지만 든든해진다. 허리에 찬 수통을 달캉이며 산길을 오르듯 바삐 운전해서 가까스로 회사 주차장에 도착하면 숨을 돌리고 한 모금 마신다. 이게 내 아침 루틴이다.


 오늘은 자주 가던 세븐일레븐이 붐벼서 회사 건물에 딸린 GS25에서ᅠ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라지 하나요.’ 컵을 하나 뽑아 들고 기계ᅠ버튼을 눌렀다. 졸졸 커피가 떨어지며 몸이 나른해졌다. 뭉친 어깨를 풀며 전국 어디나 비슷한 편의점 실내를 둘러봤다. 예외 없이 가지런한 코스모스의 세계가 든든했다. 여기나 저기나 마찬가지인 편의점은 스타벅스처럼 전국 어디나 비슷하게 생긴 데다가, 이름처럼 웬만한 편의를 다 볼 수 있다 보니 원만하게 필요한 것만 취해갈 수 있는 공간이다. 심지어 요즘엔 단백질 셰이크와 닭가슴살도 잘 나와서 운동 후에도 애용한다.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드문 경우다. 내가 편의점에서 제일 많이 사는 건 아몬드 브리즈 음료랑 바나나다. 속에 부담이 없는 아침 메뉴로 애용한다. 그렇게 아침부터ᅠ커피를 사러 들어가서 아침 식사 거리까지 들고 나오는 편의를 누렸다.


ᅠ회사 점심시간엔 막간을 이용해서 헬스장에 갔다가 테이크아웃 커피를 마신다. 갈증이 심할 때라 청량감을 느끼기 위해 아이스를 시킨다. 갈증에 급히 마셔버릴까 봐 부러 샷을 하나 더 추가해서 먹는다. 목 넘김이 따가울 정도로 쓴 커피를 마시며 스스로 각성을 촉구한다. 과거엔 점심 식사 후에 낮잠을 즐기기도 했지만, 한 번 잠이 들면 깨어나기가 너무 고통스러워 수년째 운동을 하고 있다. 파워리프팅은 짧은 시간에 큰 자극을 느낄 수 있는 효율적인 운동이다. 고중량을 어깨에 걸치다가 사무실로 돌아가면 졸리기보다는 오히려 내가 살아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잠잠하던 몸뚱이가 깨어나고 욱신거림은 독한 카페인에 누그러진다. 허기는 지우고 오직 그윽한 향만 입가를 메운다. 그런 느낌이 좋아서 난 습관처럼 운동 전후로 커피를 마셔왔다. 커피는 내 일상을 감쌌고, 틈만 나면 나타나서 날 안정시켰다. 대한민국이 커피 공화국이라는 사실이 내겐 퍽 다행이다.


ᅠ난 꽤 어릴 적부터 아침에 커피를 타 마셨다. 어머니가 주말 아침이면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둘둘둘’로 타 주셨던 기억이 난다. 몸에 안 좋고 밤에 잠도 안 온다며 만류했지만 못 이기는 척 한 잔씩 타 주셨다. 유리통에 든ᅠ아마도 맥심 마일드로 짐작되는ᅠ인스턴트커피 두 숟가락이랑 프리마와 설탕도 듬뿍ᅠ넣었다. 난 특히 프림이라 불렸던 식물성 크림인 프리마를 유독 좋아했다. 느끼한 맛이 뭐가 그리 좋았는지 프리마만 몰래 퍼먹을 때도 많았다. 요즘도 가끔 고소한 카페라테를 마실 때 프리마를 떠올리곤 한다.


 편의점을 나서려는데 점원분께서 설탕이나 크림이 필요한지 물어왔다. 난 손사래를 치며 요즘엔 다이어트 때문에 블랙커피만 마신다고 중얼거리듯이 답했다. 그는 미련 없이 다시 카톡 창으로 돌아갔다. 가득 쌓인 대화에 답을 하는 게 보였다. 창을 이리저리 넘나들며 대화를 나누는 꼴이 퍽 신나 보였다. 저 손바닥만 한 기계가 없었다면 알바 시간이 얼마나 지루했을까. 그의 안색은 무척 피곤해 보였음에도 엄지손가락만큼은 현란했다. 알 수 없는 캐릭터가 그려진 후드 티에 통이 큰 연청색 데님과 긴 생머리, 화장기 없는 얼굴이 앳되어 보였다. 한쪽 다리를 꼬고 낡고 색이 바랜 흰색 슈퍼스타 운동화를 덜렁덜렁 흔들면서 수다에 여념이 없었다.


ᅠ요즘은ᅠ다들ᅠ옷을ᅠ크게ᅠ입는다. 그게ᅠ요즘ᅠ유행일 텐데 운동한 걸 티 내느라 늘ᅠ꼭ᅠ끼게ᅠ입는ᅠ나는ᅠ언제쯤ᅠ유행이ᅠ돌고ᅠ돌아ᅠ다시ᅠ옷이ᅠ몸에ᅠ붙게ᅠ될지ᅠ궁금하다. 안ᅠ그래도ᅠ최근에ᅠ살이ᅠ붙어서ᅠ꽉ᅠ끼기ᅠ시작한ᅠ옷을ᅠ망설이다가 헌ᅠ옷ᅠ수거함에ᅠ넣었다. 어머니ᅠ말마따나ᅠ한두ᅠ치수ᅠ크게ᅠ샀으면ᅠ이럴ᅠ일도ᅠ없었을ᅠ텐데. 옷이ᅠ돌고ᅠ돌아ᅠ누군가의ᅠ옷장에서ᅠ제ᅠ역할을ᅠ했으면ᅠ한다. 아직ᅠ새 옷과 진배없는 내ᅠ옷이ᅠ어느ᅠ나라ᅠ어느ᅠ누군가의ᅠ설레는ᅠ데이트를ᅠ빛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번ᅠ주말엔ᅠ비워진ᅠ옷걸이를ᅠ위해ᅠ다시ᅠ쇼핑할ᅠ생각이다. 안 그래도 마음이 허했는데 잘됐다 싶었다. 나는 장바구니 넣어둔 쇼핑리스트에서 내 마음속 부재를 채워줄 근사한 기성품을 골라놨다. '나는ᅠ쇼핑한다, 고로ᅠ존재한다(I shop therefore I am)'라며ᅠ데카르트의ᅠ코기토를ᅠ비튼ᅠ바바라ᅠ크루거의ᅠ시각이미지가ᅠ내 이마 위에 그려졌다. 가끔 내가 글 쓰는 삶 대신 적성에서 맞지 않는 직장생활을 하는 이유가 흰색 악어로고 피케티셔츠를 사기 위해서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 지겨운 마라톤 회의에 참석하고 상사 비위를 맞추면서 사는 삶의 대가가 뭔지 헷갈린다. 체면인가. 노후인가. 어디 가서 작가라고 말하기 쑥스러워서 그런 건가. 난 비싼 악어로고 티셔츠를 계절마다 사기 위해서 출근하는 건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ᅠ내가 한창 통이 큰 힙합바지를 입고 작가의 꿈을 키워가던 시절에는 공사 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했다. 긴 시간을 써야 하는 아르바이트보다는 하루짜리 막노동을 선호했다. 부모님이 주시는 용돈으로는 대학 생활을 버텨낼 수 없었다. 좋아하는 여자에게 까르보나라를 사줘야 했고, 요구르트 아이스크림에 분홍색 스푼을 꽂고 달콤한 얘기도 나눠야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나 지금이나 좋아하는 악어 피케셔츠를 사 입어야 했다. 어디 그뿐인가. 곧 죽어도 커피는 스타벅스였고 난 노트북을 열고 작가의 삶을 살아야 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최저 임금을 받으며 일하는 편의점 알바는 질색이었다. 이러니 정규직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래서 그 흔한 극장 아르바이트나 주유소 일도 못 해봤다. 늘 돈이 급했던 나는 하루 뼈 빠지게 고생하더라도 10만 원이 훌쩍 넘는 현금을 손에 쥘 수 있는 노역이 좋았다. 그리고 어쩌면 훗날 내가 작가로서 가망이 없어졌을 때도 공사장에서 벽돌을 나르며 계속 글을 쓸 수 있기를 바랐다. 이런 막연한 구상에는 어딜 가든 나를 돈 주고 써줄 만한 튼튼한 몸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이 따라왔다.


ᅠ보통 난 새벽같이 인덕원역 앞 오래된 상가에 자리한 인력사무소를 찾아갔다. 개화기 때나 썼을 법한 낡은 소파에 앉아서 소장님이 출근하기를 기다렸다. 일찍 간 순서대로 일을 준다는 친구 말에 따라서 아침잠을 참고 갔는데 번번이 소장님이 늦게 출근해서 짜증이 났다. 그때 한창 읽던 책이 미야베 미유키, 히가시노 게이고 같은 일본 추리소설이었는데, 그때도 책을 하나 들고 갔던 기억이 난다. 난 일찍 가서 심심하면 나보다 더 일찌감치 출근한 경리 언니에게 이런저런 농담을 걸어도 반응이 싸했다. 어색한 분위기를 풀려고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지만,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대답은 없었다. 왜 그렇게 화가 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상한 건 거기 온 사람 대다수가 남자에 나이 드신 분이었는데 경리 직함에다가 누나도 아닌 언니라고 불렀다. 내가 버려야 마땅한 너절한 운동복을 입고 온 탓에 남루한 행색이라서 그런가. 누나를 언니라고 불러서 그런가. 별수 없이 잔뜩 떼가 낀 정수기로 맥심 모카골드를 타 마시고 우먼센스 같은 여성지를 읽었다. 일곱 시 조금 못 미쳐서 소장님이 들이닥쳤다. 그는 처음 보는 날 흘겨보고는 질문을 퍼부었다. '너 몇 살이냐. 일 경험은 있냐. 이거 키도 작고 삐쩍 골아서 뭘 하겠어?' 그는 나 대신 경리 언니에게 따지듯 물었고, 누나는 노란색 맥심 모카골드를 두 봉지나 타서 소장에게 건넸다. 난 옆에서 나도 모르는 새 가슴을 쫙 펴고 힘 좀 쓰는 청년을 자임했다. '몇 번 해봤어요. 미성년자는 아니에요. 헬스도 해요.' 소장은 날 꼼꼼히 살펴보다가ᅠ선심 쓰듯ᅠ공사장 일거리를 주고 다시 나갔다.


ᅠ난 이왕 고생할 거라면 철거 현장보다는 아파트 신축 현장이나 주택 재건축 공사장을 선호했다. 공사장은 항상 먼지가 많지만 유독 철거 현장은 땡볕에 먼지가 자욱했다. 어느 정도 준공에 다다른 현장은 건물로 인해 그늘이 져 덜 지치고, 현장 분위기도 한결 여유로웠다. 바야흐로 뉴타운과 재개발 붐이 일던 시절이었다. 개발 광풍이 온 도시를 휩쓸던 때라 나 같은 공사장 단기 아르바이트생을 어디서나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인덕원역 앞에 가면 한 여름인데도 목에 수건을 걸치고 긴팔에 외투까지 입은 아저씨가 있었다. 저게 선수들 옷차림인가 했다. 나도 자주 하려면 저 군화 같은 워커를 신어야 하나 싶어서 아찔했다. 저렇게 덥게 입고 하루를 버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저렇게 입지 않고는 버티기 어려운 환경이라는 게 더 충격적이었다. 나도 운동복 차림에 나이키 로고가 선명한 스니커즈를 신고 서서 누군가의 부름을 기다렸다. 그레이스 봉고차가 도착하면 다들 말도 없이 올라타서 현장으로 향했다. 차 안은 적막이 흐르고, 다 표정이 어두웠던 기억이 난다. 아마 내 속이 두려움에 시꺼멓게 타들어 가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하염없이 긴 하루를 각오해야 할 것이다. 주위를 살펴보니 후드티를 입은 내 나이 또래 녀석도 보였다. 녀석도 마찬가지로 바지에 똥을 지린 표정을 하고 창가에 앉아 있었다.


 초짜인 우린 주로 벽돌이랑 흙을 옮기는 일을 했다. 벽에 나사를 박는 기술자 아저씨를 보조하고, 여러 차례 트럭이 물자를 쏟고 가면 실어 나르는 일도 우리 했다. 십장이라고 부르는 아저씨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 튀어가야 했다. 난 잠깐 쉴 때마다 공사장 한편에 마련된 정수기 옆에서 커피믹스를 타 마시며 시계만 살폈다. 분명히 근력을 쓰는 운동이었는데, 노동은 단련보다는 소진에 가까웠다. 일 근육은 내 패션 근육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점점 허리가 아파졌고, 안 봐도 얼굴은 선크림을 안 발라서 새까맣게 탈 터였다. 에이씨, 모자라도 쓰고 올걸.


ᅠ공사장은 점심이 되면 무조건 국밥을 먹으러 간다. 이건 공짜라서 곱빼기에 밥을 두 공기나 말아서 먹었다. 녹초가 되어 밥맛이 없었지만, 아저씨들이 오후에 버티려면 무조건 많이 먹으라고 닦달해서 어쩔 수 없이 국물까지 다 들이켰다.  식후에는 당이 모자란다는 말을 실감하여 식당 자판기에서 달곰한 커피를 연거푸 뽑아 마셨다. 거기엔 프리마로 만든 우유도 있어서 커피와 섞어 마셨다. 군대 훈련소 때 마셨던 카페오레 맛이 나는 커피였다. 그때 당시 느꼈던 당을 향한 갈증이 엄습했다. 옆에서 담배를 피우는 아저씨도 종이컵을 들고 당을 주입하고 있었다. 오전 내내 벽에 공구리를 치던 아저씨는 내게 담배를 권하며 자판기 커피와 담배를 같이 마시면 인생의 깊은 맛이 우러난다며 어림도 없는 구라를 쳤다. 커피 타임엔 그동안 말 한마디 없던 아저씨들의 질문 공세를 받았다. 뜨내기가 많아서인지 뉴페이스의 출현은 그들의 오락거리였던 것 같다. 가장 선임급으로 보이는 인부들은 시시덕거리며 길바닥에라도 몸을 누이고 싶은 날 붙들고 농담을 따먹었다. 난 무시해 버릴까 생각하다가도 그러면 또 힘든 일을 받으면 어쩌나 싶어 또박또박 답을 해줬다. 밥을 먹고 현장으로 돌아가니 다들 약속이나 한 듯 낮잠을 청했다. 체력을 아껴야 했다. 공사장 주위에 널린 박스를 아무렇게나 깔고 누웠다. 그렇게 어렵사리 오후 현장을 마무리하면 7시가 되었다. 해가 질 무렵 기진맥진한 상태로 소장님께 가면 두툼한 돈 봉투를 받을 수 있었다. 소장 아저씨는 다른 데보다 더 많이 주는 거라며 말도 안 되는 생색을 냈다. 너 정도 일하는 앤 쌔고 쌨다면서도 내일 또 오라고 재촉했다. 흙으로 뒤덮인 몰골로 지하철을 타면 일하다 온 티를 팍팍 낼 수 있었다. 땀 냄새에 더러운 옷이니 절로 사람들이 날 피했다. 난 구석 빼기에 서서 한강에 내리쬐는 석양빛을 받으면서 집으로 향했다. 입에서 커피 썩은 내가 팍팍 났다.


 며칠 전 늦은 저녁까지 일하고 집에 가다가 도로 공사 현장을 바라봤다. 신호 대기 중이라 짧은 시간이었지만 잠시 쉬고 있는 인부를 구경할 수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종이컵을 들고 커피를 마시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설탕과 프리마가 잔뜩 들은 커피믹스일까. 난 무심코ᅠ그의 고된 하루를 상상했다. 노동이 주는 신성한 기쁨에 대해서, 일을 마치고 돌아가 몸을 씻고 삼겹살에 김치를 구워 먹는 시간을 상상했다. 식탁에 앉아 오늘을 무사히 마쳤다는 사실을 만끽하겠지. 피곤해서 몇 자 적지도 못하고 노트북을 덮을 테지. 난 불현듯 빈 종이컵을 구기며 현장으로 돌아갈 때 느꼈던 아스라한 피로감을 떠올렸다. 그건 확신에 가까운 기쁨이라 좀처럼 눈을 뗄 수 없었다.

이전 10화 운동의 주적은 라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