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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망지기 Oct 30. 2020

쓰기 예찬

'삶'에 '쓰기' 나무를 심는다.

나는 매일 숲으로 간다. 내가 가는 숲은 나무가 한그루도 없다. 황량한 그곳에 나무를 심어야 하는 일은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누군가가 대신 나무를 심어줄 수는 없다. 나무를 가져다줄 수는 있어도 그것을 심는 일은 오롯이 나의 몫이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손으로 나무를 심는 일은 고되지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산에 나무가 없다면, 비 오고 바람 부는 날 처참하게 무너지고 만다. 무너진 그곳에서 허우적대고 싶지 않다면 직접 나무를 심고 숲을 가꿔야 한다. 


내가 심는 나무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책 나무, 음악 나무, 걷기 나무, 살림 나무, 생각 나무 등등. 무엇이든 나무가 된다. 씨앗(혹은 묘목)을 보고도 그것이 나무가 될 줄 모르고 지나칠 때도 있다. 세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숲을 가꾸기 위해서는 눈 앞에 펼쳐진 평범한 일상을 특별하게 바라봐야 한다. 


나무를 심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어느 날은 순식간에 심기도 하지만 이틀 사흘 그 이상 소요될 때도 있다. 내 눈과 머리와 손이 움직이기만 하면 일은 착착 진행된다. 새로 심긴 나무들이 물 댄 곳에 뿌리를 튼튼히 내리기 위해서는 몸도 움직여야 한다. 매번 쓰기만 하고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자라날 나무가 아니라 곧 뽑힐 잡초에 불과하다. 


어린 나무가 자라고 자라 장성한 나무가 되려면 나는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내 삶에 책 나무, 걷기 나무, 생각각 나무 등을 심었다면 가지가 뻗어 나갈 수 있도록 나는 계속 읽고, 쓰고, 걸어야만 한다. 삶에 '생각'만 있고 '행동'은 없다면 어떻게 될까?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결심만 수없이 반복하고, 같은 곳을 맴돌며 좌절을 만들어 내는 일은 이제 그만하면 됐다. 그런 삶을 사는 데 지쳤다. 


신기한 것은 일단 나무를 심으면, 한 그루가 아니라 두 그루 세 그루 여러 그루를 심게 되면 움직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나무의 존재를 나 혼자만 알고 있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이 알고 있다면 어린나무가 잡초가 되어 뽑히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라도 나는 게으르고 나태한 몸을 움직여 나무가 자라게 해야만 한다. 


어떤 나무는 잡초는 되지 않았더라도 뿌리가 약한 나무가 있다. 약한 뿌리가 땅 속 깊이 뻗어나갈 수 있도록 나는 오늘도 세상을 바라보고, 바라본 세상을 기록한다. 내가 사는 세상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그 속에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우리'도 있다. 희망도 있지만 때로는 절망도 있다. 절망을 봐야 하는 일은 힘들지만 그것을 외면한다면 삶은 '삶'답지 못할 것이다. 


읽고, 걷고, 살림하는 일에 '쓰기'가 더해지지 않았더라면 그것들은 나무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내 삶은 여전히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황량한 대지이자, 버려진 땅인 채로 있었으리라.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곧 무너질 듯 위태로운 모습으로. 자신들이 나무가 될 줄도 모르고 내 곁에 버려져 말라비틀어진 채로 있었겠거니 생각하자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나는 오늘도 숲으로 간다. 그곳에는 나무가 자라고 있다. 어떤 나무는 곧 뽑힐 듯 위태롭고, 어떤 나무는 뿌리를 내리지 못해 힘겨워하고 있다. 마음 아프지만 뽑아낼 수밖에 없는 나무도 있다. 숲에는 간혹 잘 자라고 있는 나무가 한 두 그루 정도 보인다. 아직도 심어야 할 나무가 많다. 가꿔야 할 나무도. 때문에 나는 오늘도 손을 움직여 나무를 심고 가꾼다. 삶이라는 터전에 나무가 자라고 자라 숲을 이룰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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