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 관리에 집착하던 내가 선택적근로제를 기획한 이유
어린 시절, 나는 운동선수였다. 운동장의 세계는 명확하다. 정해진 시간에 훈련장에 도착하지 않으면 그날의 훈련을 망치게 되고, 룰을 어기면 경고를 받는다. 땀 흘린 만큼 결과가 나오고, 약속과 규율을 목숨처럼 지키는 것. 그것은 내게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그 시절 몸에 밴 습관 때문이었을까.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나는 유독 '시간'에 엄격한 사원이었다. 미리 도착해 업무를 준비하고 호흡을 가다듬는 시간이 필요했다. "9시까지 출근하면 되는가, 9시부터 업무를 시작해야 하는가"라는 해묵은 직장인들의 논쟁에서 나는 주저 없이 후자를 택하는 쪽이었다.
처음 교육 담당자로 커리어를 시작했을 때도 이 신념은 확고했다. 당시 우리 회사는 인력난으로 인해 어렵게 채용한 신입 사원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지각을 해도, 교육 태도가 조금 흐트러져도 "그저 와준 것만으로도 고맙다"는 식으로 넘어가는 관행이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누군가는 그저 월급을 받기 위해 왔을지 몰라도, 누군가는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이 회사에 입사해 자부심을 느끼고 싶어 했다. 기준을 낮춰 모두를 편하게 해주는 '하향 평준화'는, 열정을 가진 이들에게 오히려 독이 된다고 믿었다. 내가 출첵을 담당하는 교육담당자 되었을때, 나는 규정을 '상향 평준화', 아니 있는 그대로의 원칙대로 적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각 2회 시 미이수 처리, 퇴소 조치합니다."
신규 입사자 교육 오리엔테이션에서 내가 던진 말은 단순한 엄포가 아니었다. 실제로 기준을 어긴 인원에게 예외 없이 규정을 적용했다. 처음엔 "너무 빡빡한 것 아니냐"는 반발도 있었고, 나 역시 사람인지라 마음이 불편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번 원칙이 서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다음부터는 지각이 사라졌을 뿐 아니라, 교육생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 회사는 기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곳이구나'라는 긴장감이 돌자 학습 분위기가 잡혔고, 이는 곧 긍정적인 교육 성과로 이어졌다. 그때 나는 확신했다. 역시, 조직생활에서 기본을 지키는 것이 모든 성과의 시작이라고.
이후 HR 부서로 자리를 옮겨 전체 임직원의 근태를 관리하게 되었을 때도, 나는 여전히 '기본기'를 강조하는 관리자였다. 교육생처럼 퇴소를 시킬 수는 없었지만, 나는 '데이터'를 무기로 들었다. 매달 전사 임직원의 지각 횟수와 날짜, 시간을 분석해 개별적으로 메일을 보내는 '계도 활동'을 시작했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단순히 "지각하지 마세요"라고 말할 때보다, 자신의 지각 데이터가 기록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자 지각률이 50% 가까이 급감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나는 꽤나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문득, 규정 준수라는 명목 하에 융통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업무 특성상 밤늦게까지 일하고 조금 늦게 출근하는 고성과자들에게, 획일적인 9시 출근을 강요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가?
"규정이 없을 때 발휘하는 융통성은 혼란이지만, 규정이 있을 때 발휘하는 융통성은 배려가 될 수 있을까?"
아니었다. 명확한 룰 없이 상황에 따라 봐주는 '유도리'는 오히려 규정을 성실히 지키는 직원들에게 박탈감을 주고, 불필요한 오해를 낳는 리스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억지로 사람을 시간에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사람의 일하는 방식에 맞춰 변화시켜야 했다. 나는 '지각 관리'를 위해 모았던 그 데이터를 역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이 데이터를 근거로, 직원들이 원하는 '선택적 근로제'를 도입해야 합니다."
단순히 지각을 줄이기 위한 채찍질이 아니라, 몰입을 위한 당근이 필요함을 설득했다. 구글의 20% 룰이나 넷플릭스의 '규칙 없음'이 가능한 이유는, 그들에게 무한한 자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율 속의 책임'이라는 더 강력한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통제하고 억압하는 HR이 아니라, 직원들이 스스로 시간을 설계하고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돕는 HR로 나아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다행히 경영진은 긍정적이었다. 올해 사업계획에 '선택적 근로제 파일럿 도입'이 확정되었다. 이제 나의 역할은 지각생을 잡아내는 '근태 경찰'에서, 직원들이 유연하게 일하며 성과를 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제도 설계자'로 확장되었다.
물론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자율이 방임이 되지 않도록, 나는 또다시 데이터를 들여다볼 것이다. 유연근무제가 도입된 후 야근 비용은 얼마나 효율화되었는지, 업무 몰입도는 어떻게 변화했는지, 그리고 역설적으로 지각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후 구성원들의 시간 관리는 어떻게 달라졌는지 꼼꼼히 체크해 보고서에 담을 예정이다.
나 역시 한 명의 직장인으로서 내가 편한 시간에 몰입해서 일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하지만 이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최소한의 규정 위에서, 구성원 스스로가 프로답게 자신의 시간을 증명해 낼 때 비로소 우리는 '근태 관리'라는 단어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내가 9시 정각을 사수하며 조직의 기강을 세우는 통제자였다면, 오늘의 나는 그 시간이 구성원들에게 가장 가치 있게 쓰이도록 돕는 설계자다. 통제보다 자율이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믿으며, 데이터를 바탕으로 우리 조직에 꼭 맞는 최적의 일하는 방식을 만들어가는 지금. 이 치열하고 의미 있는 고민의 끝에서 나는 비로소 확신한다. 정말 “인사(HR)하길 잘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