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의 큰 행사를 책임지는 조직문화 담당자
HRD(인재개발)나 조직문화를 담당하는 사람들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오해가 하나 있다. "저 사람은 분명 '파워 E(외향형)'일 거야", "남들 앞에 나서길 좋아하는 타고난 무대 체질일 거야."
물론 나에겐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조금 더 냉정한 현실과 통계가 숨어 있다. 채용이나 보상, 평가를 다루는 HRM 직군에 비해, 우리 조직문화 담당자들은 유독 '마이크'와 가깝다. 단순히 전문 MC를 섭외할 예산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우리 조직의 맥락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구성원들과의 라포(Rapport)가 형성된 내부자가 진행했을 때 비로소 발휘되는 '인터널 브랜딩(Internal Branding)'의 힘을 알기 때문이다. 물론, "교육/조직문화 담당자니까 말도 잘하겠지"라는 조직의 암묵적인 기대감도 한몫하며 마이크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손에 쥐어진다.
나 역시 그랬다. 신입사원 시절, 입문 교육 진행자로 시작해 채용설명회 연사로, 송년회 사회자로, 나아가 창립기념일이나 시상식 같은 엄중한 공식 행사의 진행자로 무대에 섰다. 공대생 출신이지만 학창 시절부터 회의를 주재하거나 프레젠테이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탓에 겉으로는 꽤 능숙해 보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화려한 조명 아래, 재킷 속 셔츠가 식은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들어가는 긴장감은 오로지 나만의 몫이었다.
처음 행사를 기획할 때 나는 거대한 착각에 빠져 있었다. "길어야 반나절, 짧으면 2시간짜리 행사인데 준비할 게 뭐 있겠어?"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그것은 흡사 일생일대의 결혼식을 준비하는 과정과 데칼코마니처럼 닮아 있었다. 명확한 인수인계 자료도 없는 맨땅에서 나는 이벤트 플래너이자 리스크 관리자가 되어야 했다.
구성원과 경영진의 니즈를 동시에 충족하는 장소를 찾기 위해 수십 곳을 웹 서핑하고, 후보를 추려 답사를 다녀오고, 보고서를 써서 컨펌을 받는 과정은 무한 루프와 같았다. 참석 인원의 식사 취향과 혹시 모를 알러지까지 체크하는 세심함은 기본이다. 한번은 행사 당일 아침, 도착한 현수막 사이즈가 발주한 것보다 훨씬 길게 나와 등골이 오싹했던 적이 있었다. 그 짧은 순간, 뇌 회로를 풀가동해 현수막 끝을 교묘하게 접어 부착하는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넘겼지만, 그때의 아찔함은 아직도 트라우마처럼 생생하다.
행사 당일, 마이크를 잡은 나는 무대 위에서 웃고 있지만 머릿속은 '백조의 물장구'처럼 치열하게 돌아간다.
특히 시상식은 무결점이 요구되는 영역이다. PPT 오타는 현장에서 고칠 수 있지만, 이미 제작된 '상패'는 돌이킬 수 없다. 수상자의 이름, 직급, 공로 내용이 토씨 하나라도 틀리면 그 상의 권위와 수상자의 감동은 순식간에 반감된다.
그래서 나는 상패 주문 전, 마치 연구 데이터를 검증하듯 수십 번 더블 체크를 하고 배송 상태를 확인한다. 수상자의 이름이 호명될 때 정확한 BGM이 깔리는지, 영상은 끊기지 않는지, 특강 강사는 도착했는지... 이 모든 것은 단순한 운영 지원이 아니라, 직원들이 회사에 대해 느끼는 '직원 경험(Employee Experience)'을 결정짓는 결정적 순간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5분의 감동을 위한 영상 제작까지, 과거에는 이 모든 것을 혼자서 '일당백'으로 해내야 했다. 다행히 요즘은 생성형 AI의 도움으로 영상 소스를 만들고 편집하는 과정이 훨씬 수월해졌지만, 그 안에 담길 스토리라인을 짜기 위해 밤을 새우는 창작의 고통은 여전하다. TV 속 시상식을 볼 때마다 화려한 수상자보다 그 뒤에서 큐시트를 쥐고 있을 PD와 작가들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내게 되는 이유다.
행사 운영의 꽃은 플랜 B를 가동하는 순간에 핀다. 한번은 행사 시간이 예상보다 지연되어, 예정된 종료 시간을 넘길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다. 점심시간은 직장인에게 성역과도 같다. 나는 즉각적인 판단으로 큐시트를 수정해 가장 중요도가 낮은 발표 순서를 과감히 삭제했다. 대신 그 내용은 점심시간 중 스크린을 통해 공지하는 형태로 기민하게대처했다. 구성원들은 원래 그런 순서였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우리는 정시 종료라는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물론, 이렇게 땀 흘려 준비해도 돌아오는 피드백이 늘 달콤한 것만은 아니다. 물 흐르듯 완벽하게 진행된 행사는 본전이고, 작은 실수 하나는 두고두고 회자되는 것이 행사 담당자의 숙명이다. "이번 행사, 밥이 좀 별로였어.", "진행이 좀 루즈하던데?" 처음에는 가감 없는 익명 설문 결과에 상처받아 잠 못 이루기도 했다. 하지만 그 쓰라린 피드백은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욕먹지 말자"는 방어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우리 구성원들에게 최고의 경험을 선물하자"는 적극적인 마인드로 변모하는 계기가 되었다.
누군가는 묻는다. 인사담당자가 왜 그렇게까지 행사 진행과 운영에 목숨을 거냐고. 나는 대답한다. 우리가 만드는 것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구성원들이 회사를 경험하는 결정적 순간이기 때문이다. 잘 기획된 행사 하나가, 진심이 담긴 사회자의 멘트 하나가 백 마디의 잔소리보다 더 강력하게 조직의 가치를 전달할 수 있다. 무대 위에서 구성원들이 웃고, 감동하고, 서로를 격려하는 그 눈빛을 마주할 때, 며칠 밤을 새운 피로는 눈 녹듯 사라진다.
혹시 지금 이 순간에도 다가올 행사를 걱정하며 큐시트를 수정하고 있을 전국의 모든 조직문화, 교육 담당자들에게 전하고 싶다. 당신이 흘린 그 보이지 않는 땀방울 덕분에, 오늘도 회사는 조금 더 따뜻하고 매끄럽게 돌아가고 있다고. 그러니 우리, 젖은 셔츠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서로에게 박수를 보내자고 말이다.
비록 내 옷은 땀으로 젖고, 다리는 후들거릴지라도, 내가 만든 무대 위에서 구성원들이 빛나는 모습을 볼 때 나는 비로소 확신한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을 하는 나는 정말 인사(HR)하길 잘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