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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J Jul 11. 2022

김밥 이야기

엄마의 김밥





또각또각, 잠결에 들리는 도마 위 칼 소리,

칙칙 압력 밥솥이 김을 뿜어내는 소리,

보글보글 국이 끓는 소리.

그리고 동시에 풍겨오는 고소하고 촉촉한 밥 냄새.


지난주  가족여행을 다녀오고 엄마는 우리 집에서 하루  묵었다. 이튿날 아직 잠이   상태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냄새. 어릴 적부터 익숙하던, 이제는 자주 느낄  없어 그리운, 그런 어린 날의 일상을 오랜만에 맛보았다.






스케줄이 있어서 이른 새벽에 일어나는 날에는 떠오르는 냄새가 있다. 실제로 느껴지는 후각이 아닌 기억에서 소환되는 환각 같은 것이다. 진한 밥 냄새, 볶거나 부쳐낸 기름 냄새, 고소한 참기름 냄새. 냄새에 눈을 떠 신이 나 주방으로 달려가면 엄마가 김밥을 말고 계셨다. 옆에 앉아 쳐다보고 있으면 김밥 꽁지를 잘라서 먹으라고 내어 주신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도 받아서 오물오물 먹는다. 그때 먹는 김밥이 제일 맛있다.

가끔은 김이 부족하다며, 햄이나 오양맛살이 부족하다며 슈퍼마켓으로 심부름을 시키기도 하셨다. 평소라면 투덜거리던 심부름도 그날은 룰루랄라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다녀온다. 동네에서 마주치는 어른들마다 안녕하세요, 큰 소리로 인사를 하면 동네 어른들은 기분 좋게 받아주셨다. 어릴 때는 동네 어른들이 인사성이 밝다며 많이 칭찬해 주셨고 칭찬에 신이 나 더 열심히 인사를 하곤 했다. 소풍 가는 날이냐며 아는 척을 해오는 동네분들은 가끔 오천 원, 만 원짜리를 건네주시며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해주시곤 하셨다. 그렇게 집에 들어오면 기분이 더 좋아진다. 발을 구르며 날아갈 듯이 뛰어 집에 들어온다.


그렇게 김밥 냄새에 기분 좋게 깨는 날은 내 소풍날만이 아니었다. 세 자매인 우리 집은 언니의 소풍, 동생의 소풍이 있었고, 1년에 한 번씩 가을 운동회도 있었다. 일 년에 정기적으로 7번, 비정기적으로 종종 몇 번을 더 그런 아침이 있었지만 새벽 냄새에 그 김밥을 싸는 아침이 소환되는 것이 신기하다. 내가 유독 김밥을 좋아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산으로 소풍을 많이 갔었다. 가서 놀다 장기자랑 같은 것을 하고 점심을 먹고 보물 찾기를 하고 집에 오던 식이었다. 그때는 엄마들도 같이 소풍에 갔었다. 그때는 마치 운동회처럼 친한 아주머니들과 김밥과 양념통닭, 과일 등을 싸와서 나눠 먹었다. 동네에 있는 산 입구에는 미미 같은 마론인형과 장난감을 파는 사람들이 몇 명씩 와서 있곤 했다. 문구점이나 완구점에서 파는 박스에 담긴 것이 아니라 짝퉁이라 불릴만한 조금 어설프고 싸구려틱한 것들이었다. 그래도 소풍날이면 하나씩 들고 집에 올 수 있었다. 싸구려 인형들은 수명이 길지 않아서 엄마에게 몇 번이고 졸라야 했기에 소풍날에 들고 오는 인형은 전리품처럼 반가웠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나는 아니었던 것 같고 언니 소풍날이었던 것 같다. 엄마가 새벽에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김밥을 싸는 중에 전화가 왔다. 광주에 사시는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부고 전화였다. 엄마는 엉엉 울면서 싸던 김밥을 마저 싸셨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이 김밥을 먹고 학교에 다녀왔고, 엄마 아빠는 막내 동생만 데리고 외가댁에 가셨다. 어릴 때라 자세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우리를 누가 봐주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김밥을 싸던 엄마가 오열을 하고, 그러면서도 마저 김밥을 다 싸던 모습만이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그때는 어려서 죽음에 대해 어렴풋이 만 알고, 또 외할아버지를 무서워하던지라 그리 정이 없어서 엄마의 슬픔에 크게 공감하지 못했는데, 커가면서 그 장면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외할아버지보다 그때의 엄마에게 공감하기 때문이다. 엄마는 얼마나 슬프고 힘들었을까.



조금 커서 고등학생  일이다. 고등학생이 되고는 김밥을 싸가지 않고 소풍  곳에서  먹는 일이 많았다. 그래도 여전히 김밥은 좋아했어서 동생 소풍날이면 덩달아 신이 났다. 고등학교 때는 급식이 없어서 도시락을 싸고 다녔다. 야간 자율학습 때문에 점심, 저녁  개의 도시락을 싸고 다닌 집들도 있었지만, 우리 집은 언니 때부터 점심만 도시락을 싸주고 저녁은 사서 먹었다. 동생 소풍날에 엄마는 동생 김밥을 서둘러 싸주시곤  도시락으로 김밥을 준비해 주셨는데 그날은 등교 시간이 다되어서 엄마가 밥이 부족해서  김밥을 싸지 못했다고 미안하다며 김밥을 싸서 점심시간 전에 가져다주시겠다말씀을 하셨다. 낙엽이 구르기만 해도 까르르 웃는다고 하던 10 소녀 시기는 곧 지나가는 낙엽이 떨어져도 엄마 탓을 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크게 잘못된 것도 없어도 짜증을 내는 자식, 그런 자식들에게 잦은 사과를 하던 엄마. 지금 생각하면 엄마가  가엽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당시 철없고 나만 알던 못된 청소년이었다. 엄마가 배달해 주신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시락이 없다는 이유로 온갖 짜증을 냈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가 화를   내실 법도 한데 엄마는 연신 미안하다며 본인의 실수에 자책했다.


그날 엄마는 점심시간에 학교까지 김밥을 가져다주셨다. 고등학생이 되고 엄마가 학교에 오신 적이  있으셨던가,  3 수능  대학 원서   상담하러   말고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무려 김밥 도시락을 전하기 위해 오셨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없는 딸이었다. 나는 이후  일을 마음에 떠올릴 때마다 두고두고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되었지난 다 큰 후에 엄마에게 이야기를 했을 때 엄마는 기억하지 못하셨다. 맞은 사람은 발을 뻗고 자도 때린 사람은 발을  뻗고 잔다는 어른들의 말은 아마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었을.







막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로 집에서 김밥을 싸는 일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특히나 새벽에 고소한 김밥 냄새로 눈을 뜨는 아침은 없어졌다. 그럼에도 20여 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꿈인 듯 흐릿하면서도 어느 날 갑자기 선명한 기억으로 소환되어 그립게 한다. 엄마에게 김밥을 싸 먹자 하면  그냥 사 먹으라는 말씀을 하신다. 엄마 김밥이 먹고 싶다고 해달라고 조르면 안 해주실리는 없지만 나 역시 이제 더 이상 엄마를 조르지는 않는다. 엄마에게 갑질하던 철없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더 이상 엄마에게 김밥을 싸 달라기가 미안해진다. 본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순간에도 놓지 못하고 말고 있던 김발이는, 하루쯤 안 싸가도 괜찮을 고등학생 딸의 김밥 도시락은, 엄마가 우리에게 가진 책임감의 작디작은 일부였을 거다. 그 생각을 하면 뭉클하면서 숙연해지는 감정을 추스를 수가 없다. 엄마는 작은 것에서도 늘 위대했다.





이제는 엄마 대신 동생이 싸준 김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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