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다
'드디어' 이사를 했다. '드디어'라는 말이 정말 잘 어울리는 건, 금방 이사를 가겠지 하고 신혼집을 빼버린 지 8개월 만에 이사를 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나는 대로 기록해 본다.
#1. 이거 큰일났다는 걸 깨달은 순간
작년 12월은 반전세 신혼집이 만기가 되는 시기였다. 결혼하고 빠르게 아기가 생겨 계약이 끝남과 동시에 처가 쪽으로 이사를 가야 했고, 마침 계약이 끝나는 시기에 엘리베이터 공사까지 예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11월 말에 아내와 아기는 미리 처가로 가고, 나는 계약이 끝날 때까지 신혼집에 있다가 마침 예전 부모님 집이 비어 잠깐 들어가 있기로 했다.
잠깐 살면 되겠지 하고 열심히 집을 알아보다 12월 초가 되었는데, 온 나라가 뒤집히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 때 깨달았다. "이거 정말 큰일났구나." 반드시 특정 단지의 아파트를 구해야 하는 상황에서 매물이 나오지 않았고, 겨울이 지나고 봄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
#2. 출퇴근
아기가 처가에 있기 때문에 매일 처가에 가야 했다. 다행히 임시로 지내던 집이 처가와 지하철 세 정거장 거리였다. 주로 일을 잠시 멈추고 처가에 가서 아기를 씻긴 다음 재울 때까지 있다가, 밤에 일을 마저 끝마치는 생활을 했다. 그나마 프리랜서 위주로 활동을 하는 N잡러라서, 이렇게 출퇴근하듯 왔다갔다 하는 생활이 가능했다.
#3. 짐
처음에는 '임시로 잠깐 있을' 생각에 대부분의 짐을 포장이사 상태 그대로 두었다. 하지만 아내의 봄옷을 새로 꺼내고, 여름옷도 새로 꺼냈다.
의외로 부담이 되었던 건 세탁이었다. 최대한 빨래를 몰아서 한다고 해도, 꽤 많은 비용이 세탁에 들어갔다. 그리고 코인세탁소에 빨래를 가져가 돌리는 수고와 시간도 무시 못했다. (대신 자주 가니 코인세탁소 사장님이 알아보고 건조기 시트를 엄청 주시긴 했다...)
#4. 포장이사
임시로 있던 집에 포장이사로 짐을 옮기면서, 이사업체 사장님이든 직접 작업을 하시던 분들이든 곧 이사할 거니까 꼭 다시 연락 주시면 좋겠다고 이른바 '리텐션' 활동을 하셨다. 어쨌든 생각보다 시간이 훨씬 지나긴 했지만, 이사를 준비하던 시기부터 엄청 바빠져 그냥 이전에 했던 업체에 다시 연락을 해 포장이사를 했다.
예전에 이사를 했던 팀이 아예 똑같이 와 주셨다. 상당수의 짐이 자신들이 포장한 그대로였고, 냉장고는 텅텅 비어 있으니 다들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동안 한쪽은 집을 못 구해서, 다른 한 쪽은 이사하는 사람들이 확 줄어들어서 힘들었다는 얘기를 하면서 씁쓸해하기도 했다.
#5. 중국 출장
이사가 끝나고 이틀 뒤 중국 출장이 예정되어 있었다. 전날에서야 부랴부랴 필요한 준비를 하려는데, 갑자기 도착지에서 태풍으로 모든 항공편이 결항되는 사태가 발생하고, 출장은 취소되었다.
출장 기간 중 평일 이틀 동안 휴가를 낼 정도로, 아내가 짐을 정리하는 데 부담을 가졌었는데 출장이 취소되는 바람에 휴가 기간 내에 어지간한 짐들은 잘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6. 의외로 속이 썩는 사소한 문제들
이사날까지 구석에 결로로 인한 곰팡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 자리에 냉장고가 있었으니 알기 어려웠지만, 단열재를 붙이고 도배하는 비용을 매도자와 협의하는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도배를 부동산에서 소개해 준 업체에서 했는데, 마감을 제대로 하지 않아 실랑이가 있었다. 단지 상가에 입주한 업체라 앞으로 계속 마주칠텐데, 계속 불쾌할 것 같다.
#7. 아내
나는 7년 전에 독립해서 따로 나와 산 이후로, 다시 부모님과 함께 산 적은 없다. 하지만 아내는 다시 처가로 들어가서 8개월 간 같이 살았는데, 독립해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산다는 게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이사 온 집에서 앞으로 어떻게 재밌게 시간을 보낼지, 우리 가족이 휴가나 주말 때 뭘 할지 행복한 고민을 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짠함이 몰려왔다.
#8. 아기
우리 부부가 둘이서 아기를 키운 기간이 아직은 더 길지만, 아기에게 그 때의 기억이 있을 리가 없다. 아마 아기가 커서 가장 오래 전 시간을 떠올려 보라고 하면, 처가에서 자란 시간일 것이다.
아무래도 아기가 처가에 있으니 아빠로서 할 일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아기가 자러 들어가면 나는 임시 거처로 돌아갔는데, 이게 익숙해졌는지 "아빠 빠이빠이" 할 때마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여기에 내가 야간 업무 일정이 생겨 처가에 가지 못하는 날에는, 아빠를 계속 찾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더 마음이 좋지 못했다.
그나마 이삿짐을 들이고 나서 구경시켜 주러 아기를 데리고 왔을 때, 집이 마음에 들었는지 여기저기 뛰어 다니고 자기 방이 생긴 걸 알고서는 좋아라 하는 모습을 보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사를 하고 나서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가고 있다.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새롭게 출발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설레는 일이지만, 오랜 기간 떨어져 있다가 다시 함께 살게 되었다는 것에서 새로운 보금자리가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