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준은 해방 이전 활동한 작가들 중에서 이광수, 염상섭 등과 함께 가장 많은 소설 작품을 남긴 작가다. 특히 그는 한국 단편소설의 완성자라고도 불리는데, 해방 후 북으로 간 이태준은 북한서는 한때 ‘조선의 모파상’이라고도 불렸다.
이태준이 모파상처럼 스타일리스트일 수는 있겠으나, 모파상이 세상에 대해 냉담하고 비관적인 태도를 드러냈던 작가임에 비해 이태준은 마음이 따듯한 작가였다. 그러한 따듯한 그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 <달밤>(1933년)이라는 단편소설이다.
이태준이 1934년 자신의 첫 단편집을 출간할 때 표제작으로 ‘달밤’을 정한 것을 보면 이 작품에 대해 작가가 가졌던 애정이 특별했던 듯싶다. <달밤>에는 ‘황수건’이라는, 소설 속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반편이’, ‘못난이’ 인물이 등장한다.
이 못난이 인물과 함께, 작가로 짐작되는 화자(나)가 등장하여, 서로 간에 따듯한 친교를 나누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나’는 서울 사대문 안에서 살다가 성북동으로 이사를 나온다. 지금도 성북동에는 이태준 가옥이 남아 있는데, 당시 성북동은 경기도 고양군에 속해있었다.
이사 온 ‘나’가 성북동이 새삼 시골이라는 것을 실감하는 건, 바로 이 황수건이라는 반편이 때문이다. 서울이라고 못난이가 없을 리 없겠지만, 대처서는 못난이들이 거리에 나와 행세를 하지 못하나, 시골에선 아무리 못난이라도 마음 놓고 나와 다니기 때문이다.
마치 못난이는 시골에만 있는 것처럼 시골에서는 흔히 눈에 띄는 것이다. ‘나’가 보기에 황수건은 태고 때 사람처럼 우둔하면서도 천진스러운 눈을 가지고, 자기 동리에 처음 들어서는 낯선 손들에게는 소박한 시골의 청취를 돋워 주기도 하는 위인이다.
황수건의 직업은 신문보조배달로, 평생소원이 ‘원배달’이 돼보는 것이나, 보조일서도 쫓겨난다. 그는 ‘나’에게 평소의 신세를 갚겠다고 포도를 선사하나 동네 과수원서 훔쳐온 거다. 어느 날 아내가 도망가고, 그는 달밤 아래서 처량하게 뜻도 모르는 일본 유행가를 불러 젖힌다.
‘나’의 아내는 남편에게 그런 못난이와 무얼 대꾸를 해가며 지껄이는 걸 좋아하냐고 하지만, ‘나’는 그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열심으로 이야기하는 게 좋고, 그와는 아무리 오래 지껄여도 힘이 들지 않고, 또 웃음밖에는 남는 것이 없어 기분이 거뜬해지는 것도 좋다.
이태준의 또 다른 단편 <손거부>(1935년)에서도 ‘손거부’라는 덜 떨어진 이가 등장한다. 그는 사륙배판이나 되리만 한 널판때기 하나를 들고 ‘나’를 찾아와 문패를 써달라고 부탁하는데, 문패에 자기 이름은 물론 자기 식구들 이름까지 죄다 써달라고 한다.
그 문패는 글자를 모르는 그가 호구조사 나온 순사에게 방패막이로 쓰려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다면 그 문패에 번지 주소도 써놔야 할 거 아니냐고 묻는다. 그러나 ‘거부(巨富)’라는 이름과는 달리, 그가 개천 둑 국유지의 무허가 집에서 살고 있다는 사연을 알게 된다.
바보들이 등장하는 이태준의 소설은 바보들에 대한 따듯한 태도를 보여주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이러한 바보들을 소외시키는 근대 사회의 비정함, 또는 효율과 능력만을 중시하는 근대 산업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유럽에서 지능이 모자란 사람들을 사회에서 배제시켜야 한다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한 건, 사회가 산업화되고 도시화가 이뤄지는 18세기부터다. 효율성을 숭상하는 근대는 비생산적인 것으로 간주된 사람을 보호하는 것은 사회적 비용을 수반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기에 바보들을 억제‧격리하며 궁극적으로 근절코자 하는 우생학이 출현한다. 이 우생학은 인종학과 함께 발생한다. 18세기 세계를 항해하던 유럽의 계몽주의자들은 유럽 밖 사람들의 행동과 외모를 보고는, 이들을 이미 알고 있었던 자기 나라의 바보들과 연결한다.
유럽인들은 유럽 대륙 바깥세상의 사람들을 열등한 인종으로 치부하면서 그들을 지배할 생각을 하고, 내부적으로는 그 이전까지는 함께 살아왔던 바보들을 공동체 밖으로 내쫓아 재활원 등의 장소로 격리, 배제시켜 자기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한다.
근대 유럽인들이 문명의 이름으로 만든 우생학과 인종학은 향후 자기네들이 예상치도 못했던 엄청난 대재앙으로 귀결된다. 바로 히틀러 같은 파시스트가 벌인 30만 명에 달하는 장애인 가스 학살은 유대인과 다른 소수 민족을 대량 학살하는 전조이자 사전준비가 된다.
이태준의 <달밤>이 히틀러를 겨냥하여 쓴 작품은 아니리라.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 작품이 발표되던 해인 1933년 히틀러는 독일 총리가 되고, 국회의사당 화재 사건을 계기로 반대파를 강력히 탄압하는 법령을 만들며 12년에 걸친 히틀러 독재정권의 토대를 마련한다.
이태준 소설에 등장하는 가난한 이웃, 바보, 노인들을 향한 작가의 휴머니즘적 태도는, 국가와 전체의 효율성을 강조하면서 이러한 이들을 낙오자로 규정하고 진군의 나팔 속에 전쟁으로 치닫는 독일이나 일본의 파시즘(전체주의)을 향한 작가의 항변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