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재의 장편소설 <장한몽>은 몰라도 ‘이수일과 심순애’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수일과 심순애’의 원작이 <장한몽>이다. <장한몽>은 1913년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연재돼 크게 인기를 끌었다.
<장한몽>은 연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신파극으로 각색돼 연극 무대에 올려진다. 소설에서 연극으로 일종의 미디어 믹스(media mix)가 일어나는 것이다. 연극 <장한몽>도 잘 알다시피 소설과 마찬가지로 선풍적인 인기를 끈다.
신문에 인기리에 연재되던 소설이 극으로 공연된다는 자체가 일종의 흥행을 보장받는 것이다. <매일신보>는 연극 홍보에도 적극 나선다. 정기구독자를 대상으로 연극 입장료 반액할인권을 제공하는 행사도 벌이고, 연극을 본 독자들의 반응을 지면에 적극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장한몽>을 평가하는 한국문학 연구자들의 시선은 싸늘하다. 한일합방으로 정치적 좌절을 겪은 민중들은 대중예술에서 그 위안을 구하고자 했다. <장한몽>이 바로 이와 같은 민족적 허탈감을 달콤하게 달래줬다는 것이다.
<장한몽>은 ‘돈이냐? 사랑(또는 의리)이냐?’라는 그 시기의 정치현실과는 동떨어진 엉뚱한 질문을 던져, 민족적‧계급적 갈등들을 봉합시켜 버리는 사회적 시멘트(social cement)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장한몽>은 재미있는 구석이 많다.
작품 첫머리에 김중배가 심순애 등의 젊은 남녀들과 뒤섞여 노는 윷놀이 판의 광경은 마치 에밀 졸라의 소설에 나오는 파리의 주점 안 풍경같이 보인다. 방안은, 등잔불 온기와 화로 숯불의 열기, 그리고 윷을 노는 젊은이들 몸에서 나는 열기가 뒤섞여 후끈 달아오른다.
여자는 화장한 분이 땀에 씻기어 여기저기 육색(肉色)이 드러나 얼룩얼룩해지고, 쪽지고 땋은 머리가 흐트러지고 귀밑머리는 흘러내려 비녀는 거꾸로 섰다. 남자는 두루마리 옷고름을 떨어뜨린 것도 알지 못하고 가슴을 펼쳐 놓은 채로 앉아 있는 이도 있다.
윷을 던지느라 손을 뻗은 김중배의 무명지에 낀 금강석(다이아)의 광채가 심순애를 비롯한 여인들의 눈길을 끈다. 김중배의 유혹에 넘어가는 심순애, 사랑의 배신을 당하고 고리대금업에 뛰어들어 돈을 모아 애인에게 복수하려는 이수일의 삼각구도가 설정된다.
당시 사회는 금전이 지배하는 ‘수라도’의 세계로 치닫고 있다. 김중배 같은 은행업자는 일제에 예속돼 이에 기생하는 자본가의 상징이 될 수도 있다. 이들은 황금만능의 화신으로 식민지 민중과는 적대적 위치에 놓인다. 대중은 이수일을 빌려 그들을 비판하고자 했던 건 아닐까?
비슷한 시기 역시 <매일신보>에 연재되고 신파극으로 공연된 이상협의 <눈물>(1913년)이 있다. <눈물>의 ‘조필환’은 이수일 같은 고아 출신이다. 그는 ‘서협판’의 도움을 받아 유학을 하고 경성의 은행 본점 지배인으로까지 오른 후 은인인 서협판의 딸과 결혼한다.
그러나 출세한 조필환은 이수일과는 거꾸로 평양기생을 부인으로 맞고 본처인 서 씨를 배신해 쫓아내면서 <눈물>은 본격적인 가정비극의 세계로 돌입한다. 서 씨 부인은 쫓겨나면서 계모에게 맡길 수밖에 없게 된 아들 ‘봉남’과의 이별로 독자나 관객의 눈물을 쏟아내게 한다.
<눈물>은, ‘눈물을 흘리는 여자관객’이 신파극의 이미지로 고정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눈물을 유발하기 위해 극작가들이 사용하는 대표적인 수법 중의 하나가 무대 위에 아이들 또는 젖먹이를 등장시키는 것인데, <눈물>은 바로 이를 활용해 관객의 눈물을 유도한다.
서 씨 부인이 봉남과 이별하고 상봉하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자기도 모르게 거기에 연루돼 울음바다를 이룬다. 이러한 식의 눈물은 한국대중예술 전통에서 면면히 이어지는데 가령 1960년대 후반 최루성 멜로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 시리즈에서 또다시 꽃을 피운다.
교회에 가면 통성 기도를 하면서 펑펑 우는 여신도들이 있다. 어린애가 실컷 울고 나면 제 풀에 지쳐 잠이 들듯이, 신파극의 여성 관객은 눈물을 쏟으면서 현실의 걱정을 잊고 후련하기도 하고 노그라지는 기분을 느꼈으리라. 이를 대중예술의 유치함으로만 간주할 수 있을까?
<장한몽>의 관객은 이수일의 복수를 보면서 황금만능사회에 대한 분노에 공감했을 것이다. <눈물>은 가부장사회에 억눌려 살던 여성관객들이 여주인공의 비극 속에서 자신의 불행한 현실 또는 미래를 보고 공감했을 것이다. 물론 그런 공감이 썩 건강해 보이지는 않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