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도착한 것이 6월 중순인지라, 미국의 학교는 이미 여름방학 기간 중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는 9월까지 애들이 학교 가는데 다소 시간의 여유를 갖고 있었다. 우선 두 애들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 시 교육청을 찾았다. 여권과 주소지를 보여주니, 동네 근처의 팀파노고스(Timpanogos) 초등학교로 가라고 한다. 한국서 떼어간 재학증명서를 제시하니, 학년 배정은 당사자의 의견을 존중해 결정해줬다. 작은 애는 3학년, 미국식으로 따지면 중학교에 가야 할 큰애는 6학년으로 배정됐다.
학교 배정을 받고는 팀파노고스 학교를 가봤다. 방학이라 안은 볼 수 없지만 그리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찜찜했던 것은 그곳에 사는 교민 아줌마의 얘기 때문이다. 그 학교가 이른바 좋은 학군 지역의 학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딴 이유도 아니고 소위 ‘멕시칸’들이 많다는 점에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학교 가서 “까악, 까악……”하는 까마귀 우는 소리만 들으니 영어 공부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까마귀 소리는 스페인어를 빗대 말한 것이었다. 부모들의 생활수준도 낮아 친구 집에 놀러 가 봐야 배우고 올 것도 없다는 게다. 그러고 보니 이 학교의 이름인 팀파노고스도 이 지역을 탐사한 스페인 모험가의 이름을 딴 것이다. 유타는 옛날 멕시코 땅이었다.
그래서 귀가 얇은 나는 백인 부자들이 모여 산다는 산(山) 동네 학교를 찾아가 보았다. 학교 관계자를 만나 멕시칸 얘기는 쏙 빼고 외국인들을 위한 영어 교육을 여기가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일부러 찾아왔다는 식으로 둘러댔다. 학교에서는 그런 얘기와는 상관없이 기꺼이 환영한다고 했다. 그러나 문제는 큰애인 6학년 학급에 남는 정원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니 두 애를 다른 학교로 뿔뿔이 보내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까지 와서 학군 타령을 해야 되는 스스로의 모습이 갑자기 한심스러워졌다. 그래서 귀찮기도 해서지만 다시 팀파노고스 학교로 보내기로 최종 결정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뭐 잘한 것도 못한 것도 아니고 그냥 애들을 서민적(?)인 학교에 편안하게 다니게 했던 것 같다.
이후 보건소(Health Center)에 가서 한국에서 떼 간 예방 접종 내역을 공증한 서류를 제출하고 투베르쿨린 반응 검사도 받는 등 학교 가기 전 만반의 준비를 하고, 드디어 신학기가 되어 애들을 데리고 학교를 가게 되었다. 애들도 긴긴 여름 방학 끝에 학교를 가게 된 것이 두렵기도 하지만 설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정작 두려운 것은 우리 부모 자신이었다. 학교 보낼 준비는 제대로 한 것인가? 애들 선생을 만나면 어떻게 얘기해야 하나? 애들은 학교에 잘 다닐까?
학교에 가보니 배정 학급 표시는 복도 게시판에 있었다. 그런데 한참을 쳐다본 것이 배정 학급이 몇 학년 몇 반으로 표시된 것이 아니라 담임선생의 이름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딸애는 미스 데이밍 반이고, 큰애는 미세스 브라운 반이다. 데이밍 선생은 앞서 얘기한 바로 아이다호 출신의 그 선생이다. 큰애의 반인 미세스 브라운 반에 갔을 때는 담임선생은 일이 있어 못 나오고 대신 남편인 미스터 브라운이 와서 오리엔테이션을 해주었다. 각각의 선생님들과는 집에서 늘 해야 하는 숙제, 그리고 가정방문 날짜 심지어 시간까지 상의하고 왔는데, 실제 가정방문 당시 선생님들은 약속한 시간에서 일 분도 틀리지 않고 찾아왔었다.
그리고 사무실에 가서는 급식비를 어떻게 내야 하는지를 지시받았는데, 대충 몇 개월 치 금액을 선불로 받고 남는 금액은 되돌려 준다는 간단하기 짝이 없는 얘기를 못 알아들어 엄청나게 시간을 끌었다. 나도 딴 얘기라면 대충하고 넘어가겠지만 돈에 관련된 얘기라 물러설 수 없었다. 결국 내가 잘 이해를 못하는 듯하니, 아주 오래전 강원도 춘천서 모르몬 선교사를 한 적이 있다는 선생까지 불러와 설명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녀의 형편없는 한국어를 듣느니, 숫제 영어로 듣는 게 더 나을 판이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개학식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문득 느낀 것은 잘 배우지 못한 부모가 애들을 학교에 보낼 때 얼마나 답답했을까 하는 점이었다. 오늘도 그렇다. 한국에서라면 담임 선생님을 만나 애들의 장단점을 조리 있게 얘기하고 난 후, “미거한 자식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며 정중(?)한 인사말로 끝을 맺을 텐데, 선생님들에게 이와 비슷한 말을 전하려고 했건만, 상대방은 잘 못 알아듣고 재차 물어보면서 미안해하고, 나는 또 못 알아듣게 얘기한 것에 대해 미안해하고 계속 서로들 미안해하기만 하다가 헤어진 것 같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뭔가 부모로서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가볍지는 않았다.
그러나 애들은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안식년이 끝나 귀국하게 됐을 때 미국에서 좀 더 학교를 다니면 안 되겠느냐 해서 착잡한 마음을 가지기도 했다. 애들이 그런 마음이 든 것은 아마도 교사로부터 늘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졌기 때문인 것 같았다. 우리 애들이 수학 계산 문제 빼고는 다른 아이들보다 잘하는 것이 전혀 없을 텐 데도 가끔씩 최고의 학생에 뽑혀 사탕도 받아오는 것을 보며, 선생님의 판단력이 잘못되었거나 지나치게 너그러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마치 학교는 칭찬을 받으러 가는 곳 같았다. 귀국 길에 로스앤젤리스서 비행기 환승을 하며 기다릴 때, 아들애는 혼자서라도 자전거를 타고 프로보의 자기 학교로 돌아가면 안 되느냐는 말을 해서 마음이 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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