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춘향전』이 읽히기 시작한 건 18세기 중엽이다. 비슷한 시기인 1740년 영국에서는 ‘영국 판 춘향전’이라 할 수 있는 사무엘 리차드슨의 소설 『파멜라』가 출간된다. 『파멜라』는 여주인공 파멜라가 귀족 집안의 하녀로 들어가서 주인집 도령과 결혼하게 되는 이야기다.
주인 도령은 처음엔 어린 하녀 파멜라를 유혹 또는 협박하면서 자신의 성적 농락거리로 삼으려 한다. 파멜라는 이에 지혜롭게 대처하며 끝까지 자신의 순결을 지켜나간다. 그녀는 마음속으로는 도련님을 사랑하나, 자신의 낮은 신분을 생각해 도령의 사랑을 계속 거절한다.
결국 파멜라는 도련님을 감화시키고 도련님 역시 그녀의 본심을 확인하면서 아내로 삼는다. 비천한 신분의 여인이 결혼을 통해 신분상승을 이룬다는 이 이야기는 『춘향전』과 유사하다. 당시 유럽에서 이 소설의 인기는 대단해 파멜라는 하녀들의 일종의 ‘문화영웅’으로 군림한다.
『파멜라』는 뻔한 신데렐라 스토리임에도 흥미로운 요소가 많다. 이 소설은 파멜라가 자신의 부모 또는 주인집 도련님과 주고받는 편지 형식의 서간체 소설이다. 편지 글을 통해 드러나는 젊은 여성의 감정과 심리 묘사가 뛰어나다.
아니 파멜라의 심리세계가 실감 난다기보다는, 주인도령과 파멜라 사이에서 벌어지는 ‘밀당’의 사랑 이야기가 대단히 흥미롭다. 하녀의 순결을 빼앗으려는 방탕한 주인귀족과, 이를 착하고 음전하지만 당차게 대처하는 지혜로운 파멜라의 대결이 볼만하다.
파멜라는 결혼을 빙자해 순결을 빼앗으려는 도련님에게, “저는 제 정조를 인도 제국의 모든 부와도 바꿀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한답니다. 그러나 제가 소망하는 건 오직 몸을 더럽히지 않고 제가 타고난 비천한 신분으로 돌아가도록 허용해 주십사는 것뿐입니다.”라고 대답한다.
또 이런 대답도 있다. “그냥 절 순결하게 내버려 두고 제게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에게 돌아갈 자유를 주세요. 이 세상의 남자들 중에서 제가 결혼하고 싶은 남자는 없어요. 저 자신을 정숙하게 지킬 수만 있다면 그것만이 오직 제가 바라는 바예요.”
같은 시대 소설가 헨리 필딩은, 파멜라가 순결의 화신이 아니라 도덕적 위선으로 무장한 영악한 계집애라고 말한다. 사실 파멜라라는 인물은 순결을 지키려고 했던 것인지, 아니면 단지 순결의 가격을 올리려 했던 것인지 하는 의문이 들게 할 정도로 ‘밀당’의 고수다.
『파멜라』를 읽으면 당시 영국 사회가 과연 실제로 이러했을까 싶게 여성들의 정조(순결)가 강조된다. 그러나 정조 관념은 같은 시대라도 사회계층에 따라 달랐다. 프랑스 소설 『클레브 공작부인』(1678)은 프랑스 귀족들의 대단히 방종한 사랑의 형태를 그린다.
『파멜라』에 나타나는 정조, 순결의 강조는, 귀족 등 상층계급의 성적 방종도 아니고, 하층계급의 성적 분방함도 아닌 그와는 구별되는 새롭게 등장하는 중산(부르주아) 계급의 사랑의 새로운 매뉴얼(?)을 제시한 것이라 봐야 할 것이다.
즉 파멜라를 통해 사회적 신분과 육체적 매력을 내세운 과거의 귀족여성을 밀어내고 근대의 이상적인 여성상을 제시코자 한다. 연애와 구혼의 관행을 통해 성을 규제하고 내면의 깊이를 지닌 감정적 도덕적 주체로서의 여성 개인, 즉 근대적 여성 개인의 출현을 보여주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우리의 『춘향전』 역시 겉으로는 『파멜라』와 같이 기생 춘향의 정절을 강조한다. 그러나 속으론 춘향을 통해 정절이라는 유교적 이념에 묶인 여인이 아닌, 살아있는 한 인간 즉 근대적 개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춘향과 이몽룡이 나누는 대담한 섹스 행위는 『파멜라』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장면으로,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봉건적 이념서 활짝 해방된 개인을 보여준다. 『춘향전』은 민중형식의 소설이고, 『파멜라』는 중산계급의 소설이라는 데서 비롯된 차이점 같아도 보인다.
우리 소설사에서 『춘향전』과 같은 전통적 민중형식의 소설은 근대로 계승되지 못한다. 우리의 근대가 서구와 달리 서구 자본주의열강의 침입과 더불어 시작되었듯이, 우리의 근대소설은 일본 및 일본을 통해 수입된 서구를 ‘얼치기’로 모방하는 데서 시작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소설이라고 하는 이광수의 『무정』(1917년)은 자유연애가 주제임에도 『춘향전』에서 보이는 섹슈얼리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다. 그렇다고 『파멜라』에서 보이는 감정적‧도덕적 주체로서의 근대적 여인이 등장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