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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의 「봄‧봄」과 나의 장인어른

by 양문규

김유정 소설은 자신의 작품에서 민담 등의 옛날이야기 모티프를 자주 빌려온다. 가령 「소낙비」 같은 작품에는 아내의 정조를 팔아서 돈을 낚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는 아내의 지혜로 남자가 곤경에서 벗어나 부를 쌓는 민담 모티프의 왜곡된 변형이라 할 수 있다.


「봄․봄」이나 「동백꽃」 같은 소설의 경우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 즉 결혼 전이나 ‘시험 결혼’ 기간 동안 장래의 장인을 위해 노동력을 제공하는 ‘신부 노역’에 종사하여 아내를 얻는 민담에 기원을 뒀다고도 볼 수 있다.


데릴사위 신분인 「봄․봄」의 ‘나’는, 딸 점순의 키가 자라야 성례를 시켜 주겠다는 장인의 말을 믿고 돈 한 푼 안 받고 삼 년 하고 꼬박 일곱 달 동안 농사일을 돕는다. 나는 가끔은 배가 아프다는 핑계로 ‘태업’을 하기도 하나 장인에게 욕과 함께 어떤 땐 뺨까지 얻어맞는다.


장인의 원래 이름은 ‘봉필’이지만 하도 욕을 잘해 ‘욕필’이라고 불렸다. 장인은 욕도 욕이거니와 마름 신분으로 소작권을 미끼로 농민들을 강압해 동네 인심을 잃었다. 점순은 나에게 “밤낮 일만 하다 말 텐가?”리며 아버지에게 성례 시켜 달랄 것을 은근히 부추긴다.


이에 용기를 얻은 나는 장인에게 본격적으로 따지다가 외려 지게막대기로 얻어맞자, 화난 김에 장인의 급소를 잡고 늘어진다. 그러나 자기편인 줄 알았던 점순이는 “이 망할 게 아버지 죽이네!”하며 달려들어 지 아버지 역성을 드는 바람에 장인에게 더 흠씬 두들겨 맞는다.


「봄․봄」은 어떤 측면서 보면 소작인 노동 착취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 보다는 우둔한 듯싶으나 순박한 데릴사위, 얌전한 듯하면서도 당찬 점순이 등의 인물을 통해 목가적인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농촌 소설이다. 그의 대표작 「만무방」 같은 사회적 비판의 소설은 아니다.


나는 「봄․봄」에 등장하는 데릴사위 처지는 결코 아니었지만, 장인이 평생 농사를 짓다 돌아가신 양반이다. 나는 농사일이 싫다기보다는 농사 일머리를 알아먹지 못해 가급적 농번기를 피해 처가를 방문했는데 농한기에는 또 농한기 대로 일이 있었다.


장인을 도울 인력이 없으니 어쩌다가 가는 나도 요긴한 일손이었다. 그러나 나를 붙잡고 일을 시키는 장인은 너무도 답답해하셨다. 어느 날은 너무 지청구를 준 게 미안했는지, “학생들 가르치려면 이런 농사일도 알아야 하지 않겠냐?”는 구차한 변도 내세우셨다.


지당한 말씀이다! 그러면서 나 보고는 자네가 ‘신(新) 문학’을 공부했다고 해서 하는 말인데, 당신도 젊은 시절에는 ‘시인’을 꿈꾼 적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우정 그 말씀은 왜 하셨는지 잘 모르겠다.


신혼 초 장모님이 담근 약주로 장인과 술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다. 장인은 술김이었는지, “자네는 내가 뒷짐이나 지고 논에 물꼬나 둘러보고 다니는 지주인 줄 알지 모르나, 난 가진 땅도 별로 없고 더욱이 자네한테 물려줄 땅은 없으니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라.” 하셨다.


나는 속으로 ‘내가 농사를 지을 사람도 아닌데’라고 생각하면서 겉으로는 그런 말씀은 하지도 마시라고 손사래를 쳤다. 그러면서도 내심으론 나한테 땅 한 뙈기라도 주지 않으면 당신 사후에 딸 신상이 편하지 않을 거라고 혼잣말을 해봤다.


장인은 아주 오래전 돌아가시면서 처남들에겐 논밭을, 처형과 아내에겐 공동명의로 집 앞 산자락 하나를 주셨다. 아내는 그곳에 집을 짓고 이웃의 장모님을 모시고 산다. 덕분에(?) 퇴임 후 나는 이곳에 와서 아내의 텃밭과 과수 농사일을 돕는 코스프레(?)를 하며 살아간다.


아내가 나를 시골로 데려오며 한 가지 혹하는 조건을 제시했는데 책을 놔둘 서재를 마련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책을 다 버려야 할 판이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집과 학교에 흩어져 있던 책들을 구제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머리맡에 책만 이고 있으면 뭐 하랴?


나는 아내에게 솔직히 고백했다. 책은 갖고 있게 됐지만 공부는 안 할 것 같다고 했다. 아내 왈, 장인이 농사를 못 짓게 됐어도 평생 쓰던 농기구들을 버리지 못했듯이, 공부는 안 한다지만 그래도 평생을 봐왔던 책인데 어떻게 버리겠냐면서 염려 말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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