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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센치한 작가 Jun 23. 2024

호국보훈의 달. 뜨거운 6월, 잊혀지지 않길 바라며

점점 잊혀지는 호국보훈의 달.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벌써부터 더운 6월. 호국영령들의 안타까운 한탄이 아닐까. 


내 느낌에는 금년 여름은 작년보다 더 더울 것 같다. 많은 뉴스에도 이런 소식이 나오고 있다. 해수면의 온도가 이미 1도 가까이 올랐기 때문에 이번여름은 더 더울 수 밖에 없다고 말이다. 내 생각에는 점점 조금씩 잊혀져가는 호국영령의 한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의 생각이지만 점점 잊혀져가고 그 의미나 강도가 약해져가는 호국보훈의 달이 벌써 끝나가는 이 시점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6월은 슬픔이 적지 않고 분위기가 무거운 달인데 벌써 그런 느낌이 받기도 전에 꽤 많이 지나갔다는 점이 참 아쉽다. 그렇지만 내가 알리고 싶은 내용은 아직 6월이 지나가기 전에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바로 6.25 전쟁에 관련된 이야기다. 


6.25 전쟁에 대해 알고 있는가. 


나는 참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 중 하나가 아직 100년이 지나지 않은 전쟁의 상흔과 상처가 남아있는 많은 분들이 살아계시는 이 생생한 역사를 왜 심도있게 가르치지 않느냐는 것이다.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왜 이 역사를 깊이 학습시키지 않고 가르치지 않느냐에 대해서 그 이유를 알고 있다. 물론 나만의 생각이지만 나는 꽤 큰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그 이유, 나의 논리는, 지금 이 시대의 정치적인 판단이 개입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간단한 나의 논리를 언급하자면 미군에게 꽤 많이 존경을 받고 있는 백선엽은 일제시대에 간도특설대로 활약을 했었고 6.25 초반 다부동전투에서 '내가 후퇴한다면 나를 쏴라' 라는 말로 유명하여 꽤나 전공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방금 언급한 '간도특설대'는 그 부대에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독립군 또는 무고한 조선인을 꽤나 죽인 그 부대이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광복을 하자마자 반민특위에 가장 1순위에 오른 부대에 속해 있었던 장교이기에 충분히 처벌을 받았어야 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독립을 방해하는 첫 번째 부대원이 광복이 된 후 전혀 처벌을 받지 않고 6.25전쟁 때 휩쓸려 전공을 받고 모든 것이 리셋이 된 후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다. 과연 이것이 정의로운 역사의 인물으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심도있는 토론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런 것처럼 꽤나 얽히고 섥힌 이 역사를 바로 잡기조차 어려움이 많은데 정치적인 판단까지 개입을 하니 더더욱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직면해 있다. 


그런 것을 잘 모른다고 치더라도 6.25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 역사를 모른다면 언젠가 6.25는 반드시 반복이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김일성의 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대를 물리친 역사가 바로 6.25전쟁이다. 자세한 역사는 직접 찾아보기를 권유드린다. 필히 알아야 하는 대한민국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6.25전쟁의 대표적인 사진(가장 아래 오른쪽 어린 남매와 탱크가 같이 있는 장면이 참 가슴아프다.)

6.25전쟁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은 남한을 남침했다. 북한은 얼마나 교묘한지 굉장히 적절한 일자를 채택했다. 간첩 또는 정보원들을 꽤나 투입하여 남한을 자세히 분석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대한민국은 6월 25일 이후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이전까지 낙동강까지 끝없이 밀리고 밀렸다. 북한은 작전한계점에 다다른 무리한 작전을 8월 이후부터 진행을 하였지만 9월 중까지 막아냈고 인천상륙작전 이후 그 작전한계점을 극복하지 못한 채 오히려 압록강까지 밀리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당연히 중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정보를 굳게 믿은 채 1950년 크리스마스 이전까지 전쟁을 끝내기 위해 무리한 작전을 진행했고 그 사이 100만명이 넘는 중공군은 북한에 침투했고 '인해전술' 이라는 그 어마어마한 공세로 국군과 미군은 다시 수도서울을 빼앗기는 후퇴를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1.4 후퇴이다. 

그 사이 핵사용을 주장했던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해임이 되고 이 후 부임한 장군은 2차 세계대전의 용장 중 한명은 '릿지웨이'가 부임하면서 중공군과 맞장을 뜨게 된다. 릿지웨이 장군은 중공군이 무리하게 남하하면서 작전한계점이 다다랐다는 것을 본인과 그 주변 정보원들의 끊임없는 추적을 통해 완벽히 인지하였고 위력수색을 통해 중공군을 격파해 나간다. 그 위력수색 이후에는 중공군의 공포의 상징이었던 피리소리도 완벽히 극복하면서 다시한번 북진을 하게되고 그 다음 전쟁의 양상은 한치의 땅을 더 차지하기 위한 고지전을 계속하게 된다. 1951년부터 휴전협정을 맺기 위해 미국, 한국, 소련, 중공이 모여 협상을 했지만 시작부터 지지부진하게 된다. 그 사이 전투는 지속적으로 벌어지게 되고 전투는 당연히 전쟁수행에 유리한 군수기능이 뛰어난 미군에게 유리한 양상을 흘러가게 되면서 1953년 7월 27일부로 625 전쟁은 마무리가 된다. 


이제 한 번더 기억해야 될 625 호국영령들. 


곧 6월 25일이 다가온다. 이름 모를 전우들의 희생이 그냥 헛죽음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대한민국은 정말 용감히 싸웠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용감히 전투를 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덤볐다. 그 기세로 북한은 대한민국을 쉽사리 점령하지 못했다. 북한군 자주포를 격멸하기 위해 수류탄을 들고 뛰어든 김풍익이 대표적이다.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어떻게 저렇게 쉽게 버리면서까지 뛰어들 수 있는지. 김풍익은 그 전투에서는 살아남았지만 625전쟁 중 전사하게 된다. 이런 수 많은 영웅들이 있었기에 이 나라는 아직 지금 이 시점은 굉장히 힘들지만 건재하다고 할 수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는 없다. 역사가 잊혀지지 않고 오히려 영광의 역사가 되기를 바라며 글을 마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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