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걷는 듯 천천히> 독후감
책을 읽다 말고 영화를 봤다. 텍스트만 읽었을 때는 잘 와닿지 않았던 것이 영화를 보고 나서야 이해되었다. 어떤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는지, 그 안에 어떤 생각들이 흐르고 있는지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아무도 물어봐 주지 않아서 혼자 쓰는 내 나름의 기획 노트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신기하고 재밌는 포인트가 되겠지.
영화감독이든 PD든 예술가든, 어떤 세계를 만들어가는 사람은 모두 기획자라고 생각한다. 최근 몇 년 동안 고심하며 키우고 있는 기획 프로그램에 변화와 성장이 필요한 시기라 작가의 생각이 힌트가 되어 주었다. 나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렌즈를 가진 작가 덕분에 기획할 때 나도 모르게 반복하고 있는 습관이나 기획 프로세스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됐다. 책을 덮고 가장 오랫동안 생각한 점은 ‘대상’이었다. 나는 누구를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만드는가.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나는 ‘공간의 경험’을 만드는 사람이다. 이렇게 정의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동안 오프라인 공간을 바탕으로 사람을 연결하는 일을 해왔기 때문이다. 공간을 돋보이게 하는 프로그램도 있었고, ‘이 공간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야 할까’를 고민하고 내어놓은 프로그램도 있다. 3년째 이어가고 있는 북토크 브랜드 “텍스트클럽”은 여러 맥락의 조합으로 완성되었는데, ‘책을 매개로 창작자와 독자를 연결’하는 것이 가장 주요한 목적이다. 텍스트클럽을 경험하고 돌아갔을 때 모두의 삶에 아주 작은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나를 ‘제1의 관객’으로 두고 기획했고, 내가 재밌어야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창작자-독자라는 두 대상을 앞에 두고도 독자 관점의 경험을 조금 더 중요하게 생각했었다. 이 행사에 와야만 하는 이유, 이곳에서만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경험, 책에서부터 뻗어 나간 생각이나 궁금증 같은 것들. 독자 혼자 책을 읽으면 끝나는 독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다양한 감각을 사용하며 텍스트를 좀 더 입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것이 내가 가고 싶은 북토크였기 때문에.
얼마 전 열 번째 기획을 무대에 올리고 나서는 창작자의 경험도 좀 더 섬세히 다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존재의 커뮤니케이션이 성립하고, 그 사이에서 '의미'가 발생하려면 창작자/독자 구분 없이 모두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 프로그램에서는 독자의 목소리를 더 많이 듣기 위해 많이 애썼지만, 이런 노력이 창작자에게는 어떤 의미일지 깊이 고민하지 못했다. 이 시간이 창작자에게도 새로운 경험이라는 점을 자주 잊어버린 것 같다. 창작자에게는 대체 어떤 좋은 점이 있길래 텍스트클럽에 참여해야 하는지, 어떤 경험을 갖고 갈 수 있는지를 더 명확하게 전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텍스트클럽을 만드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경험을 가져간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지.
대상을 잊지 않을 것. ‘작품을 표현이 아닌 대화로 여길 것’. <걷는 듯 천천히> 안에서 발견한 가능성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