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엉 울었다. 나이가 들어선지, 철이 덜 들어선지 모르지만, 아이처럼 울었다. 비슷한 경험을 <7번 방의 선물>을 보며 했다. 하지만 그때는 뒷맛이 매우 썼다. 눈물을 뽑아내기 위해 누군가를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게 잔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뜨거운 안녕>에는 그 잔인함이 없었기에, 가지만 앙상했던 산이 온통 푸르게 변한 지금도, 그들의 마지막을 응원하고픈 마음이다.
이 영화 또한 눈물을 목표로 빤한(과한) 설정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상에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이 있는데, 호스피스 병원에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찌 이보다 못할까. 나도 병원에 한 달 이상 있었던 적이 있었는데, 초반 열흘에는 거짓말처럼 눈물이 났다. (의식을 잃은 채) 옆에 누워있는 환자와 가족을 보면, 마음이 더 아팠다.
아저씨가 되면서 내가 단단(혹은 딱딱)해지는 걸 느낀다. 상대가 세게 나오면 호락호락 물러나고 싶지 않다. 그런데 그 마음이 무장해제가 될 때가 있는데, 바로 상대가 약하거나, 약하게 나올 때다. ‘그래, 사람이 약한 존재야. 너도 얼마나 힘들겠니.’ 이게 바로 맹자의 측은지심 아닐까. 이 영화를 보면서 마음이 동한 건 그들이 안 돼서가 아니라, 우리가 같은 사람이라서.
최근 도올 김용옥 선생이 한신대에서 하는 강의 동영상을 듣는다. 기독교와 동학에 대한 이야기인데, <뜨거운 안녕>을 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이웃을 도우라는 것은, 없는 사람들과 그나마 상황이 좀 나은 사람들이 나누는 것이지, (힘, 돈, 권력) 있는 사람들이 하라는 게 아니다.’ 사랑, 기부는 수직적 구조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같아야 사랑이다.
남은 인생 이렇게 살고 싶다. 한주 열심히 일하고, 주말엔 지인들과 고기 구워 먹으면서 웃고 떠들고. 옳고 그름? 오늘 나쁜 짓 안 하고 살았으면 그만이지, 정의, 진리는 개뿔. 누군가 나의 이런 삶은 지지리 궁상이라 한다면, 나는 좋은 사람들과 지지직 고기에 시원한 맥주로 응수하겠다. 위대한 유유상종을 위하여! 바라기는, 오늘도, 내일도 당신과 함께 사진을 찍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