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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효원 Oct 26. 2023

화해할 구실

[깜언 베트남 9] 나이 마흔, 남자 셋, 여행(시즌 3)

“(버)흐흐흐흐.”


나도 모르게 입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선수들이 버디 하는 걸 보기만 해도 좋았는데, 내가 그 버디를 하다니! 연속으로 오너(Honor)가 된 안기자의 드라이버샷은 거침이 없었다. 깡! “나이스 샷!”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동반자들의 박수에 나는 춤을 췄다. 하지만 좋은 건 여기까지. 다음, 다음, 그다음이 좋지 않아 원래의 나로 돌아왔다. 버디는 운이었던가!


다음 더블 보기, 그다음 양파로 라구나 랑코의 라운드를 마무리했다. 누가 국문학 전공 안 했다 할까 봐, ‘양파-양파’로 골프장에서 문학적 수미상관의 미학을 쟁취해 냈다. ‘젠장’이란 말이 입에서 나올 법 하지만, 나는 여전히 웃고 있다. 왜? 생애 첫 버디를 했으니까! 난 생각했다. ‘내 몸속 어딘가에 버디 유전자가 숨어 있어. 양파의 허울 따위 곧 벗어버릴 거야!’


나는 그렇게 화해할 구실을 찾았다. 시작은 고약하고, 끝도 미약했지만, 중간은 제법 괜찮았던 첫 라운드. 아름다운 버디의 기억만 쏙 빼서 고이 간직해야지. 그때 눈앞에 펼쳐졌던 바다와 귓가를 스치는 바람, 그리고 함께한 사람들. 이 정도면 행복한 라운드라 할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일상에, 사서 고생한 끝에 만난 저세상 행복이다.


어느 홀이던가. 김사장과 나는 거북이와 같이 더디지만 빠르게 그린에 진입했다. 우리는 나란히 서서 한참 전에 그린 옆 벙커에 도착한 토끼 김차장의 탈출을 기원했다. 탁! ‘어, 좀 크다.’ 아니나 다를까 그린을 넘어 반대쪽 벙커에 떨어졌다.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는 김차장의 얼굴이 보였다. 심기일전하여 다시 탁! ‘어, 또 크다.’ 그린을 또 훌쩍 넘어버렸다. 나왔다, 와리가리!


나는 김사장을 보고 낮게 말했다. “야, 저 새끼 우산 뺏어!” 누가 무엇을 어떻게 쳤든 아무 상관없이 잠잠한 모래를 말없이 바라보던 김차장이, 정적이 길어질수록 불안감은 커지는데, 갑자기 “와아아!”하며 전력 질주를 시작했다. 실망과 분노를 폭발적 운동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저 아름다운 퍼포먼스. 그 모습에 감동한 우리는 동시에 외쳤다. “저 새끼 드디어 미쳤어!”


평소 에너지 넘치는 김사장은 공이 잘 맞지 않으면, 진짜 저세상으로 가버린 듯, 말이 없어진다. 음, 아마 명상일 거야. 이렇게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거겠지. 그러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좋은 샷을 날린다. 우리 남자 셋은 이렇게 각자의 방법으로 화해할 구실을 찾았다. 나이가 들면서 ‘헤어질 결심’을 많이 했는데, 이제 남은 것들과는 ‘화해할 구실’에 더 집중해야겠다.


1. 라구나 랑코: 김사장 W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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