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효원 Dec 12. 2023

줄이자!

[깜언 베트남 23] 나이 마흔, 남자 셋, 여행(시즌 3)

“줄이자, 효원아! 스코어 줄여서 또 오자!!”


우르르 쾅쾅! 번쩍번쩍!! 강렬한 BGM과 압도적 후광에 김사장은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결국 ‘열심히 하자.’는 말인데, 이렇게 비장할 것까지…. “언제까지 김차장한테 우쭈쭈 우쭈쭈 받으며 칠 수는 없잖아. 걔도 우리 데리고 다니느라 얼마나 힘들겠어.” 하긴, 아무리 자기가 이 세계로 인도했다 해도 골프 쌍둥이의 만행(?)을 지켜보는 것이 마냥 즐겁지 만은 않겠지.


김사장과 안기자는 다낭을 떠나기도 전에 스코어 줄일 전략과 다음 전지훈련 일정을 구상했다. 그런데, 우리가 타야 할 비행기가 보이지 않는다. 탑승구를 잘못 찾은 건가? 아닌데, 맞는데. 우르르 쾅쾅! 번쩍번쩍!! 전광판에 비행기 지연 안내가 떴다. 우리 태울 비행기가 천둥 번개가 너무 심해 하노이로 돌아갔고, 지금 다시 오는 중이라고, 탑승 예정 시간은 알 수 없음.


이럴 줄 알았으면 김차장이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될 것을, 아니 마사지를 더 긴 걸로 받아도 될 것을, 아니 저녁을 세계 음식으로 근사하게 먹고 와도 될 것을…. 하지만 내 마음은 알고 있다. 공을 쳤는데 맞바람이 갑자기 불어 목표 지점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한 클럽 더 길게 잡을 걸’이란 후회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잊고, 다음을 준비해야지.


급하게 이별하느라 김차장에게 돌려주지 못한 베트남 돈을 탈탈 털어 쌀국수에 맥주 한잔 하고, 다낭공항에 있는 포켓몬을 다 잡아도 비행기는 올 줄 모른다. 출발 예정 시간이 한 시간이 지났고, 자정도 훌쩍 넘었다. 농부인 나야 가을볕이 벼를 무럭무럭 자라게 할 테지만, 김사장은 새벽에 도착해 잠깐 쉬고 출근하려고 했는데, 바로 가도 정시 출근은 이미 늦어버렸다.


“아침에 힘들겠다.” “괜찮아, 잘 놀고 가는데,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어떻게, 이번 여행 괜찮았어?” “좋았지, 정말 좋았지. 위로가 되기도 했고, 생각도 많이 하고.” “무슨 생각?”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알잖아, 내가 일 벌이는 성격인 거. 필요한 일이라 시작하고,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보니 일이 너무 많다. 모임도 많고.” “그럼 좀 줄이는 건 어때?”


두 사내는 새벽 1시가 넘어 공항에 앉아 머리를 맞댔다. 일단 김사장이 지금 하는 일을 쭉 적고, (많기도 하다!), 뺄 수 있는 걸 하나둘 지워갔다. “이건 안 되는데.” “아냐, 줄일 수 있어. 골프 스코어라고 생각해!” “아, 힘들다.” “골프는 쉽냐?” “이건 하면 안 될까?” “죽을래? 이젠 시간이 제일 귀한 나이라고!” 새벽 3시, 우리는 스코어도, 일도 줄인다는 다짐을 하고 날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