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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령 Jul 16. 2019

요가하는 해파리 2

계란이 주렁주렁

계란이 참 좋다. 영양가가 높다니 소화 이용률이 낮다니, 그런 똑똑한 까닭은 잘 모른다. 잘 모르겠고, 계란이 그저 그런 식품이라고 했어도 나는 분명 좋아할 테다. 


모양은 껍질이 있으나 없으나 모난 구석 없이 선량하니 한결같고 색깔은 안팎으로 하얗고, 노랗고, 이게 다 인데다가 무늬는 없다. 복잡하지 않아 보고 있으면 기분이 편안하고 고요해진다. 염정하다. 이런 마음을 염정하다, 라고 하는데 나도 좀 생소한 말이라 정확한 의미가 궁금해서 사전을 찾아본다. 보니,


염정하다 [형용사]

마음이 청렴하고 바르다.


청렴하고 바른 마음. 아!! 탄식이 절로 나온다. 그러면서 계란이 군자로 보인다. 어쩐지 맛도 생김새도 화려와 자극이라고는 하나 없는데 묘하게도 사람을 끄는 재주가 있다했더니, 알고 보니 그런 내공이 있을 줄이야. 자고로 군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사람이 찾아오기 마련이랬다. 하나같이 모양이 다른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 차고 넘치는 사람, 턱 없이 부족한 사람, 온갖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찾아오면 군자는 주는 사람이 된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혜, 그리고 넉넉한 마음 씀씀이를 계산 하나 없이 준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닳지 않는 한결같은 마음. 군자도 한낱 인간에 불과할 텐데, 그 말랑말랑하고 별로 크지도 않은 몸체 안에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다. 그리고 계란. 둘 다 멋있다. 배를 곯는 한이 있더라도 평생 딱 붙어있고 싶을 만큼. 


언젠가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던 친구가 나한테 물은 적이 있다. 너는 꿈이 뭐니? 나이 서른 넘어 어울리지 않는 질문일지도 모르지만 참 반가운 질문이었다. 지혜로운 사람, 나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직업 탄탄하고, 돈 많이 벌고, 내 집 있고, 잘난 남편이랑 자식 있고, 그런 거 다 모르겠고 지혜로운 사람이 내 꿈이라고.  


나는 그리 오래 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많지 않은 나이에 경험이 풍부한 사람도 아니다. 우주를 통틀어 눈물 날 정도로 별 볼일 없는 먼지 한 톨에 불과하겠다. 정말 해파리마냥 소리도 없이 공기 중에 둥둥 떠다니는 존재. 그렇지만, 해파리도 촉수에 독이 있어 건들면 문다. 나는 머릿속에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 살면서 이래저래 생각 쓸 일이 꽤 있는데, 지금까지나마 살아보니,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인생 참 살기 싫네,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들이 어쩔 수 없이 많다. 도망가고 싶고, 주저앉아 울고 싶고, 차라리 나 아니면 네가 없어져버렸으면 좋겠고. 세상이든 사람이든 내 마음과 같지 않고 삶은 변덕이 심해 불안하기 짝이 없다. 선택해야하고 판단해야하고 계산해야하고, 겨우 했다 해도 내가 정말 잘하고 있는지, 너는 또 괜찮은지 모르겠고. 정말 돌아버리겠다. 이럴 때마다 군자는 어떻게 했을까? 정말이지 지혜가 간절한 순간들이 여기저기 바글바글하다. 


진짜 신이 있다면, 살면서 내게 딱 하나만 달라고 기도한다. 지혜, 그거 딱 하나만 주세요. 빌고 또 빈다. 살아생전 지혜 딱 하나만 완벽하게 무장하고 있다면 세상 살기 편하지 않을까? 매일매일 이런 생각을 한다. 사막의 모래알만큼 밤하늘의 별만큼.   


서점에 갔다. 딱히 찾는 책이 있어서 간 건 아니고,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아마도 어딘가에 볼일이 있어 강남에 갔다가 시간이 남아 들렸을 것이다. 가서 그냥 이 책 저 책 구경을 했는데 넓은 가판대에 있는 책 더미 속에서 계란요리책이 눈에 띄었다. 달걀이라는 글자도 그렇지만 표지가 쨍한 주황색이라 한눈에 알아봤다. 세상의 모든 달걀 요리. 외국인이 저자였는데 아침 점심 저녁, 심지어 자기 전에도 먹을 수 있는 달걀의 84가지 요리방법을 알려준다고 했다. 했는데, 그게 내 눈에는 지혜로운 군자가 될 수 있는 84가지 방법으로 보였다. 지혜! 나는 눈이 반짝반짝해져서는 덥석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내용도 가격도 보지 않고 카운터로 숑. 말 그대로 숑, 하고 갔다. 혼자 흥분해버려서는 콧김 푹푹 내뿜으며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그리고... 책값이 삼 만원. 아니, 넘었던가? 어쨌든 나는 영수증에서 가격 앞에 붙은 ‘3’이라는 숫자를 똑똑히 보았다. 헉! 비쌌다. 내가 아무리 군자계란이 되고 싶을 정도로 계란을 좋아한다지만 삼 만원은 진짜 너무했다. 바로 반품했을 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나는 그러지 못했다. 왜 그랬는지는 나 자신도 모른다. 집에 와서 읽어보니 계란 요리책에 있는 계란 요리 방법은 나로서는 하나도 간단하지 않았으며, 또 이해했다하더라도 죄다 품이 드는 일이라 귀찮아 보였다. 결국 펄럭펄럭 몇 장 대충 읽다만 꼴. 그리고 지금까지 책꽂이에 고이 모셔놓고 있다. 배는 곯지 않지만 평생 군자님 옆에 딱 붙어있듯이.


꿈을 꾸었다. 계란이 주렁주렁 열려있는 나무 꿈을. 나무는 컸고, 사방으로 쭉 뻗은 나뭇가지는 굵고 씩씩했으며 넉넉한 이파리들이 나뭇가지를 꽉 붙들고 있었는데 뜨거울 정도로 생기가 타오르는 초록색이었다. 먹자, 군데군데 열려있는 탐스러운 계란들을 보며 꼭 먹고 말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나무를 탈 줄 모르는 사람이지만 주저 없이 나무를 탔다. 잉차잉차 올라가 계란을 따먹었다. 탁 따서 톡 깨뜨려 먹고 또 먹었다. 요리도 없이 손쉽게. 먹는 내내 꿈이었지만, 이렇게 먹고 나면 진짜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콩닥콩닥 가슴이 뛰었다. 탁, 톡, 탁, 톡, 콩닥콩닥 콩콩 콩닥콩닥 콩콩... 그러다 쿵! 어찌된 까닭인지 나는 나무에서 떨어졌고 꿈에서도 깨어났다. 설렘은 뒷맛이 꽤 강하게 남았는데 지금까지도 계란나무가 머리통에 뿌리를 박고 자라고 있는 기분이다. 아, 머리야. 거 되게 무겁네. 


계란이 참 좋다. 쪄서 먹고, 프라이를 해 먹고, 스크램블을 해 먹고, 비록 이게 다이지만 계란을 좋아하는 마음은 군자 못지않게 한결같다.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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