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나무가 당신께 전하는 말
저는 백만 송이 장미 같은 화려함은 없지만
청아한 하얀 소나무, 백송입니다.
저는 여기 서촌의 낮은 건물 어딘가에 서 있습니다.
화려한 벚꽃은 금세 떨어져
벗 잃은 듯 정적을 남기는데 반해,
저는 그저 한결같이 이 자리를 지킵니다.
가장 큰 한그루가 모진 풍파를 겪었다 하지만,
주민들이 직접 가꾸어준 여기 세 나무들은
당당히 뿌리를 내리고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상아색 껍질로 드러냅니다.
사람과 건강한 관계를 맺은 나무들은
동네의 품격을 높인다고도 합니다.
네, 나무들은 인간들이 건축한 자극적인 형상 또는
슴슴한 형상의 건물들과도 기꺼이 친구가 되어줍니다. 나무들은 자신을 땅에 앉혔던 사람들을 기억한다고 합니다. 서촌에 가면 저에게 몇 마디 안부인사를 건네보세요. 줄기의 껍질 몇 미리가 흔들리는 장면을 발견한다면 주변 어린아이에게도 백송을 소개해주세요. 그 아이가 언젠가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되어 이곳에 발걸음을 옮겼을 때 제가 먼저 안부인사를 건넬지도 모릅니다.
나무들도 때로는 실수를 하고 오판도 합니다.
가끔씩 저를 완벽에 가까운 생명체로 묘사하는 문인들도 있는데,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지나가는 현란한 이상기온에
온 마음을 다해 꽃을 피우는 나무도 있었어요.
한겨울이었죠.
그 나무는 너무 일찍 기운을 써버려
막상 봄이 오기도 전에 지쳐버렸어요.
동료 나무들에게도 웃음거리가 되었죠.
벌레들도 유난히 지친 그 나무를 더 쉽게 물어뜯었습니다.
나무들은 빛을 좋아하지만,
그러나 때론 잘못된 빛에 진심을 걸기도 합니다.
어느 이름 모를 소녀의 거울에 반사된 인공 햇빛,
고층건물 유리창에 반사된, 뜨겁고 허망한 환영.
어떤 사이비에 빠진 것처럼
그 빛이 내일도 계속될 거라 믿으며,
때로는 최악의 조건에 순응합니다.
어떤 나무는 사력을 다해
피톤치드를 내뿜고,
나무껍질이 갈라지지 않도록
매끈하게 가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칡덩굴이 그 몸을 휘감기 시작하면 그 어떤 저항도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무들이 정성 들여 틔운 새싹은
이른 아침 부지런하고 선한 눈을 가진 고라니에게
모조리 뜯겨 나가기도 합니다.
그간 지탱해 온 시간들이
한순간에 사라집니다.
나무는 참 많이도 무너지고 넘어집니다만,
그게 나무의 일상이자 운명이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부모, 형제, 선배 나무들처럼,
그저 하루하루 뿌리를 내리고
성실히 자라온 저 건너 뒷집 나무도
어느 인간의 담장을 넘어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딘 톱날에 가지가 질겅질겅 잘려나갔습니다.
나무들은 옷도 없고, 통장도 없고, 휴대폰도 없습니다. 그저 태어난 곳에서 오늘의 광합성을 합니다.
햇살을 받고, 바람을 견디고,
때에 따라 찬사와 비난도 받습니다.
응애들에게 몸속 구석구석을 파 먹히기도 합니다.
딱따구리에게 하루 종일 두들겨 맞은 적도
있어요.
난 너무 아픈데, 인간들은 남녀노소
그게 신기하다며, 자연스럽다며, 조화롭다며,
나의 인내를 카메라에 담습니다.
또 어느 날은,
내 속을 흐르던 수액에
어느 인간들이 바늘을 꽂고 회복시켜주기도 합니다.
또 어떤 날은,
얼어 죽을 것만 같아서 광합성을 최소화하고
슬슬 동면에 들어가려 했는데,
단풍잎이 너무 예쁘다며
밤낮없이 사진을 찍고 주워다가 그걸 책갈피로도 씁니다.
인간들은 극단적입니다. 우리에게 무관심하거나,
또는 연신 “아름답다”라고 말합니다.
황망한 가지를 보고, 줄기를 만지고,
영양소가 묻은 낙엽을 밟으며 계속 소곤댑니다.
“아름답다”라고. "닮고 싶다"라고.
또 그들은 어떤 날엔 슬픈 눈으로,
어떤 날엔 기쁜 눈으로 나를 쳐다봅니다.
한 얼굴에 여러 개의 눈망울이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나무들은 새가 내 가지에 둥지를 트는 것을
기꺼이 허락합니다.
새들은 고맙게도 벌레를 잡아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기꺼이,
그들의 무거운 집을 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을 지켜보는 일도 꽤나 흥미롭습니다.
나는 화려한 무대에 오르지 않아도
매일을 살아냅니다.
나는 허무와 햇살 사이에서,
매일 조금씩, 그저 살아내는 나무입니다.
화려한 나무,
조용한 나무가 있고
어떤 나무는 빛을,
어떤 나무는 그림자를 잘 견딥니다.
그리고 나는,
그 둘 사이 어딘가에서
오늘도 조용히,
가볍게,
이 무거운 하루를 살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나무 옆을 지나칠 땐,
조용히 인사해 주세요.
오늘 날씨 좋다고, 또는 정말 별로라고.
나무들은 잎사귀와 바람으로 당신의 안부를 묻고
그렇게 당신을 기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