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도 되는 건 모르게 둘래요
"애 하나 낳아놓고 지극정성이다.”
오랜만에 만난 엄마가 눈을 흘겼다. 안절부절이 기본값인 딸의 모습이 안쓰러워서 하는 말인 건 안다. 하지만 남들 하는 절반쯤 겨우 따라가나 싶은 내가 극성이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잘 먹여야 낮잠을 잘 자니 내가 쉴 수 있고, 안 먹으면 결국 내가 그 투정을 다 받아줘야 해. 내가 살고 싶어서 그런 건데 왜 유난스러운 사람으로 만들어.”
엄마가 된 딸의 애먼 짜증을 받는 것은 항상 내 부모 몫이다. 지친 마음에 기댈 시간이 한정적이라 자꾸만 뾰족해진다. 편하게 키우는 게 누군들 좋지 않겠나. 하지만 아이의 기질과 엄마의 기질, 그리고 주변 환경과의 상호작용은 그렇게 단순한 화학반응이 아니다. 여유와 기다림의 육아라니. 체력이 바닥인 시기의 나에게는 사치다.
육아가 관전이 아닌 참전 영역이 된 후 분하고 섭섭한 게 참 많아졌다. 아이는 그렇게 안 해도 잘 자란다는 말이 그렇다. 옛날에는 다 모르고 키웠단 말도 마찬가지다. 육아를 보조하는 최신 도구들만 놓고 보면 지금이 더 편리한 세상임이 맞다. 하지만 결코 더 편안한 세상은 아니다. 온 동네가 같이 키운 옛날은 지금보다 덜 힘들고 덜 외롭지 않았을까. 앞집 옆집 풀어 두면 사회성도 밥도 잠도 저절로 챙겨졌겠지. 구전되는 정보와 경험을 따르다 내게 잘 맞지 않더라도 품앗이 육아가 방패가 되어 타격이 적지 않았을까.
우리 아파트 현관문 너머엔 고요함만 있을 뿐이다. 육아가 이렇게 외로운 일인지 예전에는 까맣게 몰랐다. 지방에 친정을 둔 처지가 이토록 서글플 줄도. 비슷한 시기에 출산한 지인들은 왜 이리 멀리 사는 건지. 교류 없는 시스템의 조리원을 선택해 동기를 못 만든 것이 후회도 된다.
그러나 바꿀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아쉬움은 내려놓기로 했다. 내 곁엔 종일 잠이 옅고 식탐이 얕은 아이가 있다. 이유 모를 울음이 이어질 때 정신이 아득하다가도 온 세상이 신기한 듯 천천히 가누는 목과 반짝이는 눈, 통통한 볼 미소를 보면 입꼬리가 풀리고 숨이 탁 쉬어진다. 이 작은 천사와 나는 오늘 하루도 잘 살아내야 한다. 그래서 자꾸만 탐색하고 서툴게 시도하는 것이다.
신생아 시절에는 밤이 오는 것이 무서웠다. 수면교육에 관련된 의사의 블로그와 베스트셀러 책을 찾아봤다. 처음에 습관을 잘 들여 똑똑하고 게으르게 키우라고 하나같이 말했다. 매일 밤 우는 아이를 눕혀놓고 방에서 혼자 낑낑댔다. 한번은 며칠간 계시던 부모님께 절대 방문을 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바깥 쪽 문고리만 붙잡고 애를 태운 부모님은 한 시간도 더 지나 패잔병마냥 문을 열고 나오는 내 모습에 기가 차 하셨다. 정말 이게 맞냐고 물으셨다. 대답할 힘이 없었다. 모유수유와 마찬가지로 수면교육 역시 내게는 동앗줄이 아니었다.
이유식과 유아식을 위해 참고한 책들도 떠올려 본다. 내 눈에 탕평채나 신선로 수준으로 보이는 요리법이 그득했다. 경쟁서가 많으니 서로 더 특별한 요리를 만들어 보여줘야 했으리라. 그마저 거뜬한 엄마도, 만들었다 하면 잘 먹는 아이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아이를 키우는 대부분의 엄마는 시간이 없다. 게다가 아이란 안 먹을 이유를 백가지 정도 갖고 태어난 존재다. 오랜 정성과 시간을 들인 음식을 팽개치는 아이를 보는 엄마의 마음은 짧은 새 지하 수천미터까지 내려 찍고 올라온다. 쉬고 잘 시간, 눈 맞춰 놀아줄 에너지도 그만큼 준다. 그래서 요리법은 많아야 5단계, 되도록 3단계 정도로 단출하게 끝나는 것이 적당하다. 항상 정보가 고픈 엄마이지만 그것이 무분별하고 과하다는 것을 이쯤부터 분명히 느꼈다. 필요한 내용은 감추거나 줄여두고 약한 마음을 인질로 잡아 흔드는 것이 많다는 것을. 세상 모든 정보의 속성이 그렇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언젠가 전복 요리를 해 보겠다고 인터넷 검색을 한 적이 있다. 검색 결과대로 남편과 나는 전복 이빨을 빼겠다며 연신 힘을 들였다. 험난한 작업을 마치고 시어머니께 전화해 어떻게 이렇게 힘들게 전복 요리를 해오신 것인지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황당했다. 당신은 전복 이빨이 무엇인지 모르신다는 것이다. 이빨 손질 없이도 맛있는 전복을 먹어왔고 요리도 쉬웠다는 불편한 진실. 이번에 손질법을 알아버린 이상 다시 그 전으로 돌아가 편해질 수 없다고, 이제 전복을 사는 일은 없을 거라 농담하며 우리는 웃었다.
육아도 마찬가지다. 질문 자판기에 하나의 동전을 넣으면 감당할 수 없이 많은 정보가 쏟아져 나온다. 개중에는 몰라도 되거나 더 어려운 방법이 섞여 있다. 무엇이 맞고 틀린지 알기 어렵다. 한번 알게 된 이상 몰랐던 과거로 돌아가기도 편치 않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무엇인가에 계속 쫓기는 기분이 들었다. 피곤에 짓눌려 베개에 머리를 뉠 때도 눈을 감으면 기저귀나 우유를 제대로 주문했는지에 대한 생각이 가득해 잠들 수 없었다. 머릿 속이 꼬리표 없는 정보들으로 터져나갈 지경이었다.
다행히 시간이 나의 편이 되어 흘렀다. 아이가 크는 것만으로도 물리적인 여유가 생긴 것이다. 예전과 다르게 조금 더 천천히 심호흡하고 비워낼 수 있다. 하지만 외동의 엄마로 살아가는 이상 내 육아는 늘 처음이고 막막할 것이다. 앞선 이들의 조언을 묻고 찾는 일상도 크게 달라지지 않으리라. 그래서 정보는 나의 변함없는 구원자이다. 다만 그것의 손을 잡되 끌려다니지 않으려 한다.
한때 SNS 속 남들의 유아 식판과 주말 체험활동 사진이 조바심의 화살로 와 박히곤 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날 돌연 앱 삭제 버튼을 눌렀다. 지우기 전까지만 해도 혹시 이로 인해 모든 정보로부터 격리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웠다. 다행히 어디에도 위기는 없었다. 대신 깊고 넓은 평화가 선물처럼 찾아왔다.
그래서 이제는 구태여 확성기 앞에 다가가지 않아도 됨을 안다. 내 숲에는 새와 바람이 저절로 소식들을 물고 찾아오리라. 그러다 진심으로 원하고 필요한 순간이 올 때면 직접 무리 곁으로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어야지. 모든 것을 빠르게 알지는 못하겠지만 남들의 주파수와 속도에 맞추지 않겠다. 음량을 줄이고 나사를 느슨하게 풀어 나의 육아를, 나의 삶을 지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