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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탈리 Apr 04. 2023

호칭의 속도는 마음의 속도와 다르다

내가 되어 버린 이름들

내가 무엇이 되었는지 깨닫기 전에 이미 그것으로 불릴 때가 많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수많은 관계 속의 내가 되는 것임을 알았다. 호칭의 속도는 마음의 속도와 다르다. 준비가 채 되기 전에, 또는 그것이 진실이 아님에도 이름표를 덮어 새로운 스티커를 붙인다. 컨베이어 벨트를 지나는 통조림을 분류해야 출고가 되는 것처럼 허술한 스캔을 거쳐 황급한 사회적 이름을 지어 부른다. 속도와 사실의 미세한 차이 때문에 순간순간 마음에 생채기가 생긴다.


은행 대기 의자에 앉았다. 소규모 지점이라 좁은 공간에 직원이 두 명, 손님도 두 명 있었다. 창구 직원이 손을 들고 큰 소리로 “어머님, 이 쪽으로 오세요” 외쳤다. 백발의 어르신이 허리를 짚으며 일어났다. 연세가 비슷해 보이는 우리 할머니를 떠올렸다. 무릎은 괜찮으신가. 전화 한 번 드려야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이 한번 더 “어머님”을 외쳤다. 짧은 정적이 있고 나서 두 번째 같은 말을 외쳤을 때에야 주위를 둘러봤다. 손님은 나 뿐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직원을 바라봤다. 그는 나와 눈을 맞추곤 두 손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다. 그 후로는 그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왜 나는 어머님으로 불렸을까. 좀 더 섬세하지 못했던 관례적 예우라 이해해야겠지. 갓 서른을 넘긴 나이를 머쓱해하며 민낯의 수척함을 거울에 비추고 웃어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일은 왜인지 한참이나 울컥했다. 백발 어르신의 다음 차례만 아니었어도 그리 분하지는 않았을까. 아니, 나이에 대한 오해나 앞선 이와의 비교 때문이 아니었으리라. 나는 직원이 내뱉은 호칭의 무심함에 베였다. 돌쟁이 아이를 키우던 즈음이라 사실 ‘어머님’이란 부름 자체는 귀에 익었다. 만약 어린이집, 소아과 진료 대기실처럼 아이와 함께 있는 상황이라면 누구보다 빠르게 일어설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옆에 빈 의자를 둔 채 오직 나로 앉아 있었다. 자신으로만 존재하는 곳에서 그런 부름은 아무래도 마땅하지 않다. 나의 개성, 역할, 책임을 공적 관계에서 넌지시 규정해 버리고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무감함이라니.


사실 '내가 나인 줄 모를 호칭'만 놓고 보면 낯선 일이 아니다. 누구와 함께 있을 때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결혼 제도에 올라탄 후부터 호칭은 계곡의 물살처럼 좁고 깊게 방향을 틀어댔다. 예식을 준비하던 시기에는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올 때마다 "신부님!" 외치는 첫 마디에 움찔했다. 성당도 식장도 아닌 공간에서 나는 신부님이 될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다. 낯간지러움을 누르며 메마른 사무실에서 최대한 소리를 낮췄다. ‘너는 신부다’ 최면을 거는 호칭에 부응해야겠단 부담에 바삐 움직였다.


어머니가 되는 것처럼 이름을 빨리 잃어버리는 일이 있을까. ‘신부님’ 정도는 놀이공원에서 짧게 쭈뼛하다 개운하게 마친 어트랙션과도 같다. 임신과 출산 후 '산모님'이 된 나는 이름의 특성에 맞게 나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애썼다. 신체의 변화 때문에 보통명사로 규정된 것을 이해하면서도, 면전에서의 호칭조차 동일하다는 것은 한참이나 어색했다. 분만실에서 오한이 몰려와 이를 딱딱 부딪치던 때가 기억이 난다. 도무지 참을 수 없어 약한 소리를 했을 때 간호사 선생님이 눈을 부릅뜨고 한 글자씩 힘을 주어 말했다. “산모님, 아기 안 낳을 거예요?” 고지를 코 앞에 둔 산모로서 정신이 번쩍 든 나는, 연습한 박자대로 다시 힘을 주었다.


조리원에서는 공동 소파나 침대 맡에 기대어 한숨 돌릴 때마다 환청이 들렸다. “쁨이 엄마!” 그것이 환청이 아님을 깨달을 때면 무거운 발을 끌며 신생아실로 향했다. “쁨이가 배고프다고 엄마를 찾네요.” 남편과 함께 지은 아기의 태명이 다른 사람이 나를 부르는 이름으로 시간 단위로 쓰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엄마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엄마가 되었다. 적합한 호칭임에도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까끌하고 불편했다. 모르는 이가 함께 가져다 놓은 격식과 의무, 정보들에 가려 그 뒤에 선 나를 보기 어려웠다. 이건 비밀인데 사실 내겐 태어날 때부터 가진 이름 석 자가 있다. 쭉 그렇게 불리고 쓰며 살아왔다. 그런데 갑자기 새 이름으로 살라니 서투름은 당연한 게 아닌가.


자동 수강 신청된 ‘역할 변신 단기 속성 과정’을 멈춘다. 대신 새로운 가족과의 시간을 뭉근히 데우기로 했다. 이전에 알던 나와 이전에 몰랐던 지금의 내가 스미듯 만나야 한다. 뻗어나갈 곳을 찾으며 더디 나무를 감싸는 덩굴손처럼 나는 지금도 계속 엄마가 되고 있는 중이다. 원래 알던 나로서의 엄마가 되고 있다. 따라서, 변함없이 오랜 세 글자 이름의 내가 되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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