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나온 시간들 Jun 08. 2022

몽고반점

  친구야,

  새벽에 눈이 떠졌어. 좀 더 자려고 했는데 잠이 오지 않아 그냥 일어났어. 갑자기 예전에 읽었던 한강의 <몽고반점> 생각나서 다시 꺼내 읽었어. 결혼한 지 한참이나 지난 그녀에게는 왜 아직도 몽고반점이 남아 있던 것일까? 


  “그제야 아내가 온 것을 안듯 처제는 멍한 얼굴로 이편을 건너다보았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시선이었다. 처음으로 그는 그녀의 눈이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어린아이가 아니면 가질 수 없는, 모든 것이 담긴, 그러나 동시에 모든 것이 비워진 눈이었다. 아니, 어쩌면 어린아이도 되기 이전의, 아무것도 눈동자에 담아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그들에게서 몸을 돌려 베란다 쪽으로 다가갔다. 미닫이문을 열어 찬바람이 일시에 밀려오도록 했다. 그는 그녀의 연둣빛 몽고반점을 보았고, 거기 수액처럼 말라붙은 그의 타액과 정액의 흔적을 보았다. 갑자기 자신이 모든 것을 겪어버렸다고, 늙어버렸다고, 지금 죽는다 해도 두렵지 않을 것 같다고 느꼈다.”


  처제였던 그녀는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서 살고 있었어. 남들은 그녀를 정신병에 걸린 것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기준에 의해 판단할 경우에나 그런 것이 아닐까 싶어.


  “그는 숨을 죽인 채 그녀의 엉덩이를 보았다. 토실토실한 두 개의 둔덕 위로 흔히 천사의 미소라고 불리는, 옴폭하게 찍힌 두 개의 보조개가 있었다. 반점은 과연 엄지손가락만한 크기로 왼쪽 엉덩이 윗부분에 찍혀 있었다. 어떻게 저런 것이 저곳에 남아 있는 것일까.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약간 멍이 든 듯도 한, 연한 초록빛의, 분명한 몽고반점이었다. 그것이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뜻밖에도 성적인 느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그녀는 그저 자신의 마음에 따라, 감정에 따라, 느껴지는 것에 따라 행동하고 살아갈 뿐이었어. 마치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아직도 몽고반점이 사라지지 않은 아이처럼 살아가고 있었을 뿐이야. 그것은 당연히 사회가 규정해 놓은 기준에 부합하지 않을 수밖에 없고, 대부분의 사람들, 가족마저도 그녀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


  “그녀를 찍은 테이프들은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광선과 분위기, 그녀의 움직임들은 숨 막힐 만큼 흡인력 있는 것이었다. 어떤 배경음악을 깔아야 할까를 잠시 생각해 보았으나, 진공상태와 같은 침묵이 나았다. 부드럽게 뒤척이는 몸짓과 나신 가득 만발한 꽃들과 몽고반점-본질적인, 어떤 영원한 것을 상기시키는 침묵의 조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어떤 것일까? 그건 아마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웃음이 아닐까 싶어. 아직 몽고반점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의 티 없이 맑게 웃는 모습, 그것보다 더 예쁜 것은 없을 거야. 


  예술의 궁극적인 이유는 아마 아름다움 그 자체가 아닐까 싶어. 아직 사회의 때를 입지 않은, 사람들의 인위적인 것이 더해지지 않은, 편견과 선입견으로 편협하지 않은, 제도와 윤리라는 것으로 옷 입혀지지 않은, 그러한 인간 본래의 모습에서 아름다움은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어. 그저 그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 그 자체로, 순수한 끌림이라는 그 자체로 충분하지 않을까 해. 


  “지금 베란다로 달려가, 그녀가 기대서 있는 난간을 뛰어넘어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이다. 삼층 아래로 떨어져 머리를 박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이 깨끗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 못 박혀 서서, 삶의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인 듯, 활활 타오르는 꽃 같은 그녀의 육체, 밤사이 그가 찍은 어떤 장면보다 강렬한 이미지로 번쩍이는 육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처제의 세계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그는 아내가 보는 앞에서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것이 마음 편했을지도 몰라. 사회적으로, 윤리적으로 감당하기 힘들 테니까. 하지만 그는 그 길을 택하지는 않아. 다만 예술가였기 때문만은 아닐 거야. 그건 아마도 그가 바라던 세계를 경험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   


  


작가의 이전글 그녀는 왜 채식주의자가 된 것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