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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인 마음여행자 Oct 25. 2019

짬뽕 한 그릇 먹으러 가는 시간

학창 시절, 엄마한테 야단을 맞고 혼자 집을 나섰던 어느 날이었다. 정처 없이 걷다가 불현듯 어디론가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아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는 가고 싶지 않았다. 무작정 버스에 올랐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창밖을 바라보며 한참을 달렸다. 어느 순간 낯선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논밭이 보이고 사람의 모습이 뜸해졌다. 시내를 벗어난 듯했다. 차 안에도 손님은 몇 명 남아 있지 않았다. 한적한 시골길을 한참을 더 달린 후에야 버스는 종점에 도착했다. ‘학생 내려, 종점이야!’ 기사 아저씨의 굵고 투박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버스에서 내렸다. 생전 처음 보는 낯선 곳이었다. 사위는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덜컥 겁이 난 나는 내렸던 그 자리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는 왜 이렇게 늦었냐며 또 야단을 쳤다. 나 홀로 일탈이었지만 엄마의 화난 목소리에도 더 이상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시작된 방황은 생각보다 오래 이어졌다. ‘성적’이라는 유일하고 단순하기 짝이 없는 잣대로 전공을 택한 결과는 부적응자라는 참담한 낙인이었다. 일찌감치 공부에 대한 마음의 셔터를 내린 후 전공과는 상관없는 과를 기웃거렸다. 전공 성적이 곤두박질치는 동안 평소에 관심 있었던 영문과에서 수강한 과목에는 A플러스의 성적이 찍혀 있었다. 웬만한 영문과 학생보다 높은 점수였다. 아쉬웠지만 당시에는 전공을 바꾸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상은 온통 벽이었고 무수한 벽 앞에서 번번이 좌절했다. 애초에 쓰레기통에 깊이 처박아버린 전공을 대신해 새로운 진로를 모색해야 했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자존감은 바닥을 쳤고 ‘쓸모없음’을 공식적으로 확인받는 시간은 고통스러웠다.     



바다가 보고 싶었다. 우울하거나 힘들 때 하필 바다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대자연이라는 근원에 기대고 싶은 오랜 진화의 산물일까? 버스를 타고 역으로 가서 부산행 기차표를 끊었다. 역은 번잡하고 시끄러웠다.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저마다 행선지를 향해 바삐 걸어갔다. 기차 안에서 만난 사람들은 기차가 떠남으로 해서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인연이 된다. 당장은 조금 쓸쓸하지만 쓸쓸함이 스며드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여행은 왠지 그래야 할 것도 같았다.     



광안리 바다로 기억한다. 그때 내가 도착한 곳이.. 이십 대 중반의 여자가 홀로 바닷가에 서 있었다. 이른 봄이라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얇은 트렌치코트는 추웠고 마음은 그보다 조금 더 추웠다. 얇은 코트로는 몸과 마음의 추위를 가릴 수 없었다. 부산까지 내려갔지만 그 날 내가 한 일이라곤 바닷가에 도착해서 하염없이 서 있다가 다시 돌아온 것이 전부였다. 떠날 때 보다 돌아오는 기차에서 더 쓸쓸하고 외로웠다. 하지만 어둑어둑한 창 밖으로 보이는 희미한 불빛을 바라보며 어쩌면 새로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 날 이후 대학원 입학을 준비했다. 전공을 바꿔서 지원했고 지금껏 바꾼 전공으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경부선 종점까지 내려갔다 다시 돌아온 단순하고 의미 없는 행위였지만 나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그 후로도 마음이 낙엽처럼 바스락 거릴 때면 무작정 버스에 올랐다. 목적지도 없고 동반자도 없었다. 종점까지 갔다가 다시 오는 무의미한 행위일 뿐이었다. 그저 끝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게 목표라면 목표였다. 바뀌는 풍경과 정류소마다 타고 내리는 사람들도 바뀌었다. 슬라이드처럼 지나가는 풍경과 사람들이 묻히고 온 거리의 냄새를 맡으며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종점에 도착하면 허름한 식당에서 라면을 먹거나 주변을 어슬렁 거리는 게 고작이었지만 엉키고 설킨 마음의 실타래가 조금씩 제 자리를 찾아가는 듯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창문에 머리를 부딪치며 졸았다. 눈을 떠 보면 어느새 제자리에 나를 부려 놓은 버스는 매연을 내뿜는 뒤태를 남긴 채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곤 했다.      



아무에게도 나의 종점 여행을 말하지 않았다. ‘이렇게 라도 해야 마음이 풀릴 것 같아서’라는 말을 했을 때의 마음의 온도와 질감의 미세한 결을 헤아려줄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시인 이병률의 <여전히 남아 있는 야생의 습관>을 읽으며 젊은 날 종점행 버스를 탔던 내 마음을 비로소 이해받았다.    



서너 달에 한 번쯤, 한 세 시간쯤 시간을 내어 버스를 타고
시흥이나 의정부 같은 곳으로
짬뽕 한 그릇 먹으러 가는 시간을 미루면 안 된다
...
자신이 먹는 것이 짬뽕이 아니라 몰입이라는 사실도,
짬뽕 한 그릇으로 배를 부르게 하려는 게 아니라
자신을 타이르는 중이라는 사실까지도.    



심장이 더운 열기로 화끈거릴 때, 마음이 한없이 쪼그라들어 사라질 것 같만 같을 때, 참담함으로 가슴이 무너져 내릴 때 나는 종점행 버스에 몸을 실었던 거였다. 기어코 길을 나선 후에라야 아무것도 아닌 시간 속으로 나를 밀어 넣을 수 있었다.


삶은 날마다 종점행을 결심할 정도로 녹록지 않지만 어느 날부턴가 더 이상 종점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지 않게 되었다. 목적 없는 행위에 시간을 낭비(?)할 만한 용기도, 낭만도 존재하지 않는 지극히 현실적인 도시인의 삶을 살고부터였다. 잘못 끼워진 단추는 다시 맞추기 힘들다. 여전히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어정쩡한 삶의 경계에 서 있다.    


이번 주말에는 나도 ‘시흥이나 의정부 같은 곳’에 다녀올까 한다. 짬뽕 한 그릇 시켜놓고 조용히 나를 타이르고 오련다. 무의미의 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믿기에 다시 무의미의 축제 속에 발을 담그는 소심한 일탈을 꿈꾸는 사이 어느새 날이 밝았다.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young_geul.1016/

블로그: https://blog.naver.com/mndstar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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