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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인 마음여행자 Oct 31. 2019

멀쩡한 사람 바보 만들기

지인들과 술자리에서 B가 말했다 “와이프가 자꾸만 지적하니까 이젠 내가 진짜 모자란 놈 같아” 농담으로 한 말이었지만 이 말을 듣는 순간 오래전 직장상사가 떠올랐다. 멀쩡한 사람 바보 만들기는 생각보다 쉽다.    

    

늦은 나이에 들어간 직장은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학교 졸업 후 바로 결혼을 했고 전업주부 생활만 10년을 훌쩍 넘어선 시점에 일을 하겠다고 사회에 뛰어들었으니 어찌 보면 무모한 짓이기도 했다. 직장에 들어가겠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응이 “이제 와서 뭐 하러?” “애들은 어쩌고?” 라며 한사코 만류했던 이유였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육아와 살림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내가 사라져 간다는 위기의식이 최고조에 달한 때였다. 폭발 일보 직전의 분화구나 다름없었다.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결국 악착같이 공부해 시험을 통과했고 간절히 원하던 직장인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멋진 옷을 입고 출근하는 세련된 커리어우먼을 상상했던 내게 현실은 환상이 아님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회는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어느 누구도 뒤늦게 들어온 나이 든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러기엔 각자에게 맡겨진 일의 하중이 지나치게 무거웠다.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하루하루 버티기에 급급했다. 설상가상으로 직속상관은 워커홀릭에다 성격이 유별나다고 소문이 자자한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친절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를 대했지만 아무런 이력도, 준비도 없이 직장에 들어온 것을 알게 된 순간 A는 돌변했다. 철저하게 자기중심으로 업무를 처리했으며 업무를 도와준다는 명목 하에 사사건건 내 일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지시적 어조로 일관했으며 작은 실수라도 할 경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비난하고 책임을 따져 물었다. 젊은 사람들을 제치고 좋은 성적으로 합격했다는 최초의 자부심은 온 데 간데 없이 사라진 자리에 위축되고 초라한 자아만 남았다. 나는 어리버리한 사회초년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권위적인 A는 나와의 관계에서 금방 우위를 점했다. 업무를 하는 동안 A는 내 감정을 좌지우지했고 그가 휘두르는 대로 움직이는 나는 연약한 나뭇가지와 다를 바 없었다. 참으면 참을수록 점점 더 무기력해졌고 그는 날이 갈수록 기고만장해졌다. 기름 떨어진 자동차처럼 덜덜 거리며 겨우 달려가던 내 자존감은 A로 인해 순식간에 바닥이 드러나고 말았다. A는 나를 철저하게 길들였고 A의 의도대로 잘 길들여진 강아지가 된 나는 눈치보기에만 급급했다. 공격적으로 비난할 때는 완전히 위축되었다가도 어쩌다 칭찬 비슷한 말이라도 하면 금세 기분이 나아졌다. A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도 눈치를 살피는 나는 이미 한 사람의 건강한 주체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이런 생활이 반복되자 점차 내 능력을 의심하게 되었고 그 사람이 없으면 일처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한심한 인간이 되었다. 스스로의 판단을 믿지 못했기에 A가 결정해 줄 때까지 기다리기만 했다.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 모든 게 내 탓이라 생각하고 심하게 자책하며 괴로워했다. 어느 순간 A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실제로는 하자 없는 멀쩡한(?) 사람이었지만 나는 내가 어딘가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주 잠깐씩만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나중에는 내 의식을 완전히 점령해 버렸다. 이제 다음 단계는 실제로 모자란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었다. 간단한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고 잦은 실수를 반복하며 모자란 사람에 합당한 행동을 했다. 그러다 보니 상사의 지적질은 더 심해졌고 자존감은 곤두박질쳤다. 해야 할 말을 속으로 삼켰고 억울함은 점점 쌓여갔다. 스트레스로 예민해져 집에 가면 입을 다물었고 아이들에게도 엄마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관계를 끊고 다른 길을 모색했어야 함에도 직장생활이 처음이었던 나는 요령도, 자존감도 없었다. 끊임없이 불행하다 느끼면서도 지옥을 헤치고 나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었음에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도 못했다. 권력관계에서 철저하게 을의 입장이 된 나는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한 채 그저 시키는 대로, 무기력하게 순응만 하고 있었다. 만약 대응한다고 해도 철옹성처럼 단단한 A는 끄떡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느 날 아침, 출근하려고 전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계절은 딱 이맘때쯤이었다. 낙엽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한 가을의 중턱에서 마음을 다친 한 여자가 망연자실 철길만 바라보고 있었다. 타고 가야 할 지하철이 곧 도착했지만 그냥 보내고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등교거부가 아닌, 출근 거부였다. 직장으로 향하는 전철만 아니라면 어떤 전철이라도 타고 사라지고 싶었다. 그만큼 절박했다. 어렵게 들어간 직장에서 입사와 동시에 퇴사를 고민해야 할 만큼 고된 시절이었다.    

     

하지만 결국 시간은 흘러갔고 서툴기만 했던 업무가 어느새 손에 익어 실수가 줄었다. 큰 그림이 보이면서 조직의 흐름도 눈에 들어왔다. 그의 행동이 횡포에 가깝다는 자각이 비로소 들었다. 적극적으로 내가 처한 사실을 알리기 시작했다. 동료들과 대화를 통해 나만 어려웠던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 때 그 사람과 일을 한 사람 모두 깊은 상처를 받았음을 알게 되었고 우리는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아픔을 공유했다. 부서장에게도 고충을 토로했다. 철저히 혼자라고 생각했을 때는 외롭고 힘들었지만 공감해 주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었다. 마음이 조금 단단해졌다.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일방적으로 순응만 하던 것에서 차츰 벗어나 조금씩 내 목소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부당한 요구에 대해서는 거절을 했고 일방적으로 처리한 일은 수정을 요구했다. 처음에는 긴장되고 힘들었지만 내 요구가 정당한 것이었기에 A도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행동반경이 넓어지고 동료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늘어나자 그동안 자기가 한 행동이 꺼림칙했던지 내 눈치를 보는 것도 같았다. 절대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던 지옥에서 나는 조금씩 발을 빼내고 있었다. 3년을 같이 근무한 후에야 그 사람과의 실질적인 관계는 끝이 났다.    


관계는 언제나 어렵다. 모든 사람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 영향력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로 옮아간다. 중심은 언제나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 관계의 예의를 모르는 안하무인의 사람에게는 그에 합당한 적절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 영원히 휘둘리게 된다. 값비싼 대가를 치른 후 알게 된 진실이었다.


멀쩡한(?) 사람을 바보 만들기는 참 쉽다. ‘너는 모자란 인간이야’라는 암시를 계속 주기만 하면 된다. 당한 사람은 스스로 ‘모자란 사람’으로 위치를 설정한 뒤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하게 된다. 예전의 내가 그랬듯이 말이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사람은 상대가 약자임을 파악한 순간 포식자로 돌변한다. 노리개로 전락한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다.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전부다.  더 이상 타인의 그림자가 나를 잠식하게 내버려 두지 말자.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young_geul.1016/

블로그: https://blog.naver.com/mndstar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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