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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기 위해 기록한다

by 최영인 마음여행자

제주의 하늘은 더없이 맑고 청명하다. 하지만 그 아래 선 늙은 말의 시간은 흐릿하게 저물어 가고 있다. 한때는 바람을 갈랐을 갈기 털은 여전히 무성하지만, 세월의 더께가 앉아 윤기를 잃은 털은 낡고 억센 카펫처럼 변해버렸다. 손을 대면 까슬까슬하게 갈라질 것 같은 털 속에는 묵직한 세월이 내려앉아 있다. 하지만 부드러운 등줄기의 곡선에서는 꺼져가는 생명의 온기가 희미하게나마 느껴진다. 끝내 꺾이지 않은 곡선, 한때 질주하던 생명의 흔적이다.


젊고 활기찬 말들이 무리 지어 사료를 먹을 때, 홀로 떨어져 그 풍경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루비아나. 사진가 박찬원은 우연히 그 쓸쓸한 뒷모습을 발견하고 가던 길을 멈춘다. 1999년생 루비아나. 미국에서 태어나 두 살 때부터 경주 트랙을 질주했던 이 말은, 5년간 열일곱 번의 대회에 출전해 세 번의 우승을 포함, 아홉 번이나 시상대에 오르는 빛나는 젊은 날을 보냈다. 하지만 수많은 환호를 등에 업고 경주마로 달리던 시절의 영광은 찰나에 불과했다. 2007년, 루비아나는 낯선 땅 한국에 종마로 팔려 왔다. 이후 8마리의 새끼를 낳으며 마지막 쓰임까지 다한 그녀에게 남겨진 것은 ‘안락사’라는 차가운 선고였다. 쓰임이 다한 말에게 내리는 인간의 잔인한 처분이다. 그는 목장주를 설득해 루비아나의 마지막 7개월을 카메라에 담기로 결심한다. 박찬원의 사진집이자 에세이인 <사랑한다, 루비아나>는 그렇게 한 생명의 마지막을 향한 깊은 교감과 존중의 기록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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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사진 속에는 때로 한 사람의 일생보다 더 깊은 진실이 담겨 있다. 모든 쓰임을 다하고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는 루비아나를 보는 순간, 작가는 자기 자신을 떠올렸을 것이다. 오랜 시간 몸담았던 조직을 떠나 은퇴라는 이름의 황혼을 맞이한 그에게, 루비아나의 처지는 자신의 삶과 아프게 겹쳐졌을 것이다. 그것은 비단 작가 한 사람만의 감상은 아닐 것이다. 우리 모두의 삶이 그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젊은 날, 우리는 가족을 위해, 생계를 위해, 혹은 꿈을 위해 온몸을 던져 달린다. 트랙 위를 달리던 경주마처럼, 오직 앞만 보고 전력으로 질주한다. 그렇게 모든 것을 쏟아부은 경주가 끝났을 때, 우리 손에 남는 것은 닳아버린 몸과 깊어진 고독, 그리고 언젠가 마주해야 할 죽음의 그림자다. 어쩌면 이것이 인간 실존의 가장 정직한 요약일지도 모른다.


사진가 박찬원이 제주 목장에서 늙은 경주마 루비아나를 마주하고 카메라를 들었을 때, 그것은 단순히 한 동물의 모습을 프레임에 담는 행위를 넘어선다. 모든 쓰임을 다하고 이제 죽음이라는 마지막 정류장을 기다리는 한 생명의 시간을 ‘깊이 들여다보는’ 행위였다. 수많은 젊고 활기찬 말들 사이에서, 오직 그만이 루비아나의 빛바랜 갈기털과 고단함이 새겨진 등줄기에서 하나의 우주를, 지나온 세월의 서사를 읽어냈다. 본다는 것은 이처럼 대상을 향한 가장 깊은 애정의 표현이며, 기록은 그 시선을 붙잡아두려는 간절한 의지의 산물이다. "나는 당신을 보고 있습니다. 당신의 시간을 기억하겠습니다."라는 소리 없는 약속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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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고 지친 말의 깊은 눈 속에서 나는 아버지를 보았다. 평생을 가족의 생계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자신을 돌볼 겨를 없이 고된 일상을 지나온 아버지. 젊음과 건강을 온통 자식들을 위해 쏟아내고 난 뒤에는 병든 몸과 나이 듦이 주는 서글픈 고독을 마주해야 했다. 젊음은 모두에게 주어진 선물이지만, 그것은 오래 붙잡을 수 없는 불빛이다. 쓰임은 사라지고, 환호는 잦아들며, 남는 것은 몸의 고단함과 다가오는 고독뿐이다. 자식들이 각자의 경주를 위해 트랙으로 나아갈 때, 아버지는 텅 빈 경기장에 홀로 남아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했다. 그리고 어느 날, 소리 없이 홀로 그 길을 떠났다.


한때는 누군가의 ‘자랑스러운 경주마’였고, ‘든든한 가장’이었지만, 시간은 모든 역할을 지워내고 우리를 벌거벗은 존재 그 자체로 기어이 돌려놓는다. 루비아나의 굽은 등허리에서 나는 아버지의 등을 본다. 세월에 짓눌려도 끝내 꺾이지 않은 곡선, 그 안에 담긴 의지와 사랑. 모든 생은 결국 멈추고, 모든 존재는 홀로 떠나지만, 그 빈자리를 메우는 것은 다름 아닌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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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원 작가가 루비아나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듯, 나는 루비아나와 아버지를 통해 삶의 보편적인 서사를 읽는다. 그것은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가 겪어야 하는 유한함의 운명이며, 그렇기에 더욱 애틋하고 존엄한 이야기다. 루비아나의 마지막 7개월은 그저 한 동물의 기록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아버지들이 온몸으로 살아낸 시간에 대한 헌사이다. 박찬원의 작업이 개인적인 기록을 넘어 ‘아버지의 삶’과 ‘인간의 보편적 실존’이라는 더 큰 서사로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모두가 유한한 삶 속에 갇힌 유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기록은 그렇게 개개인의 섬을 잇는 다리가 되어, 우리가 혼자가 아님을 확인시켜 준다.


결국 기록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소중한 존재가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져 완전히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그 존재가 지녔던 고유한 빛과 온기를 어떻게든 붙잡아두고 간절한 싶은 마음이 셔터를 누르게 하고 펜을 들게 한다. 그것은 유한한 생명을 향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약속이다. "당신은 여기에 존재했었고, 우리는 당신을 잊지 않겠다." 이 땅의 모든 아버지들이 온몸으로 살아낸 시간을 기억하려는 마음처럼, 기록은 소멸에 맞서는 가장 위대한 사랑의 행위임을 믿으며 나는 오늘도 아버지를 기억하기 위해 기록한다.

비록 이제는 곁에 없지만, 아버지가 달려온 모든 순간들을 가슴에 새기며 미처 하지 못한 말을 뒤늦게 전하면서. 사랑해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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