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담배를 끊으셨을 때였다. 늘 손에 쥐고 있던 익숙한 것을 놓으니, 그 자리를 채울 무언가가 절실하셨던 모양이다. 마치 허전한 마음의 빈틈을 메우려는 듯, 아버지는 자꾸만 주전부리를 찾으셨다. 그중에서도 아버지가 가장 좋아한 것은 수제비, 칼국수 같은 밀가루 음식이었다. 엄마의 소화 불량 탓에 밀가루 음식은 우리 집 식탁에선 좀처럼 환영받지 못했다. 아버지는 그런 엄마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가끔은 간절한 눈빛을 보내셨다. 하지만 엄마는 한 번도 당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고, 국수가 끓는 날에도 당신만은 꿋꿋이 밥을 드셨다.
어쩌다 엄마가 큰 선심을 쓴 날,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국수 한 그릇이 아버지 앞에 놓이면, 아버지 얼굴이 아이처럼 환해졌다. 그 천진한 웃음을 보면서도 나는 늘 무심했다. "난 수제비 싫은데요. 밥이 좋아요." 퉁명스러운 한마디에 아버지의 얼굴은 이내 머쓱하게 굳었고, 말없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으셨다. 그때는 몰랐다. 작은 말 한마디가 입맛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소박한 행복마저 앗아갔다는 것을.
아버지는 퇴근길에 종종 팥빵을 사 오셨다. 말랑한 빵 속에 달콤하고 묵직한 팥소가 가득 찬 팥빵을 유난히 좋아하셨다. "애들 먹으라고" 엄마의 핀잔을 피하려 둘러대는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왠지 모를 기대와 설렘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우리 자매들은 부드러운 크림이 가득한 크림빵을 더 좋아했다. 늘 어긋났던 취향 속에서 아버지는 식구들 몰래, 혹은 모두가 잠든 밤에 홀로 팥빵을 드셨다. 그 모습이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웠을지, 나는 끝내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버지의 취향은 늘 가족의 중심에서 한 발짝 비켜서 있었다. 팥칼국수가 특히 그랬다. 집 근처 작은 식당에 가면 아버지는 망설임 없이 팥칼국수를 주문하셨다. 나를 비롯한 식구들은 늘 맑은 국물의 칼국수를 시켰고, 아버지는 홀로 팥으로 걸쭉한 팥칼국수를 드셨다. 식탁 위에서조차 아버지는 자주 혼자였다. 그 외로움이 아버지의 몫이라 여겼다.
세월은 아버지의 몸을 먼저 갉아먹었다. 좋아하시던 팥빵이나 팥칼국수조차 탈이 나기 일쑤였고, 엄마의 잔소리는 늘어만 갔다. 용돈까지 줄어든 아버지는 결국, 그토록 좋아하시던 간식 하나도 마음 편히 드시지 못했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도 내 용돈을 보태거나 함께 식당에 가자는 말을 단 한 번도 꺼내지 못했다. 나에게는 흔한 빵 한 조각, 시시한 국수 한 그릇일 뿐이었으니까.
장례를 치르고 정처 없이 걷던 어느 날, 길가의 ‘팥칼국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멈췄다. 작은 식당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국수를 앞에 두고 젓가락을 들었다. 곱게 간 팥과 쫄깃한 면발, 새콤한 나박김치의 조화는 놀라울 만큼 깊은 맛이었다. 땀을 흘리며 국수를 삼키는 순간, 문득 깨달았다. 왜 이제야 이 맛을 알아버린 걸까. 혼자 먹는 팥칼국수는 단순히 배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외로움까지 함께 삼켜야 하는 일이란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날 이후, 찬 바람이 불거나 마음이 허전할 때면, 나는 홀로 팥칼국수 집을 찾아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을 달랜다.
기억들은 삼키지 못한 덩어리처럼 가슴에 남았다. 평생 그렇게 좋아하시던 팥빵을 나는 단 한 번도 먼저 사다 드리지 못했다. “그깟 빵 한 조각”이라고 흘려보낸 무심함이 지금도 나를 찌른다. 아버지에게 팥빵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 밀려난 취향이자, 혼자만의 작은 위안, 고단한 삶을 버티게 한 소박한 기쁨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작은 기쁨마저 지켜드리지 못했다.
빵집 앞을 지날 때면 쇼윈도 속 팥빵을 오래 바라본다. 투명한 유리 너머, 두 손에 빵을 들고 아이처럼 환하게 웃던 아버지가 보인다. 따뜻한 팥빵 하나를 건네며 “아버지, 이거 팥빵이에요, 드셔 보세요 ”라고 말하지 못한 후회가, 지금도 마음 한 구석을 떠돌고 있다. 후회는 그리움이 되고 아픔이 되어 내 안에서 여전히 생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