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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뛰기 바를 넘는다는 것

나는 넘을 수밖에 없어!

by 배아리



나는 어릴 때부터 키가 컸다.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부터 교실 맨 뒤에 앉곤 했다. 그냥 다녀도 큰 키 때문에 안 그래도 눈에 띄던 나는 어느 날 육상팀 코치님의 레이더에 포착되고 말았다. ‘너 높이뛰기 해보지 않을래?’ 나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았으나 워낙 작은 학교였기에 계속 코치님을 마주칠 수밖에 없었고, 한번 뛰어나 보라는 말에 장난 삼아해 봤던 그것을 3년이나 하게 될 줄 그때는 정말 몰랐다.


운동 신경이 아예 없던 내가 육상팀에 든다는 것은 고작 열 살 남짓했던 어린 나에게 충분한 고난과 시련이었다. 육상팀 스케줄은 학기 중에는 등교해서 1교시 시작하기 전 아침 운동, 학교 마치고 오후 운동이 있었다. 방학 때는 매일 2시간씩 연습을 나갔는데 1시간은 육상팀 모두가 함께 하는 기초 체력 단련, 뒤 1시간은 각자 종목에 맞는 연습을 시켰다. 기본적으로 체력이 없는데 키 빨로 스카웃된 나는 일단 육상팀 기초 체력 훈련부터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뭘 해도 제일 느렸고 제일 못했다. 그놈의 연대책임. 너무 느린 나 때문에 선배들까지 모두 벌을 서곤 했다. 지금 보면 다 같은 귀여운 초딩에 불과하지만 그때는 한 두 살 언니 오빠가 정말 무서웠던 시절이었다.


나는 정말 그만두고 싶었다. 일단 코치님에게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으나 나에게서 메달의 가능성을 본 코치님이 받아들일 리 없었다. 두 번째로는 담임 선생님께 말했다. 하지만 담임 선생님은 아침 조회 시간마다 나를 운동장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는 없단다.‘ 지금은 워낙 당연하게 느껴지는 말이지만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니 내 인생인데 하기 싫은 걸 해야 한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이 말을 믿을 수 없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기도 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담임은 그때 고작 스물 중반쯤 되었을 사회초년생이었을 텐데 무슨 힘이 있었겠나 싶다. 결국 마지막으로 엄마를 데리고 교장실에 찾아갔다. 교장실 앞에 주저앉아 하기 싫다고 엉엉 울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역경을 물리치고 교장 자리에 앉은 자. 살아남은 자가 강하다는 말이 있듯이 그는 유려한 화술로 우리 엄마를 설득했다. 운동을 조금 해주는 게 아이들 성적 향상에 도움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며. 과연 자녀 교육에 열정적인 알파맘이었던 엄마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리고 높이뛰기를 계속 시켜보자는 ‘교장실 합의’가 타결되었다. 나는 당사자인 나의 동의 없이 합의가 맺어지는 폭력적인 과정을 보고 그만 어안이 벙벙하고 말았다.


그러면 사실 대회에 나갔을 때 못 넘으면 되지 않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욕심이 많은 나는 그게 잘 안 됐다. 대회에 나가면 그런 복잡한 정치적인(?) 문제들을 뒤로하고 눈앞의 바에만 집중하게 되곤 했다. 이걸 넘느냐 못 넘느냐 그것만이 문제였다. 그렇게 자꾸 1등을 하고야 말았다. 결국 3년 간 수많은 메달을 따냈고, 전국 체전으로 가기 전에 그만두게 되었다. 그렇게 하기 싫은 운동이었는데 그래도 이걸 함으로써 어릴 때 깨달은 것이 있다.


높이뛰기는 살살 달려가다가 마지막 3~4 발자국을 팍팍팍 빠르게 뛰어 들어가서 바를 넘게 되는데, 대회 때는 그 찰나의 순간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느껴지곤 했다. 그 순간에 보통 '아, 넘을 수 있을 것 같다.' 혹은 '못 넘을 것 같다.' 하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들곤 했다. 물론 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도 못 넘은 적도 많다. 그런데 신기한 건 못 넘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넘은 적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무의식을 ‘할 수 있다!’로 바꿀 수 있는가. 경험한 바로는 그냥 무작정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보자!라고 마음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답은 충분한 연습과 훈련에 있었다. 나 스스로가 나 이 정도면 최선을 다했다 싶도록 노력했을 때 그게 내 자존감이 되고, 그 마지막 도움닫기하는 순간에 내 무의식에서 긍정적인 신호로 발현되었다.


‘나는 넘을 수밖에 없어!’



살면서 수많은 높이뛰기 바를 만나게 된다. 본질은 어릴 때 넘었던 그 바와 같다. 인생은 결국 본질이 같은 일의 연속이라는 생각이다. 그저 이걸 넘기 위해서 어떤 연습이 얼마큼 필요한지에 집중하면 된다. 열 살의 어린 나도 넘었던 바를 서른다섯의 내가 못 넘겠나 하는 치기 어린 패기도 장착해 주고 오늘도 바를 향해 외치며 달려간다. 나는 넘을 수밖에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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