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돌핀과 도파민과 세로토닌 그 사이 어딘가
여자들은 산책이나 필라테스, 부위별 살 빼기 같은 운동 정도만 하던 시절에 혼자 헬스를 시작했던 나는 좀 더 빡쎈 운동을 기웃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리복에서 주최하는 스파르탄 레이스를 보고 꽂혀서 친구를 꼬셔 참가하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 장애물 레이스 같은 거라고 보면 되는데 당연히 잘 못했다. 하지만 거기에 참가한 다른 사람들을 보고 크로스핏이라는 운동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단 둘이 온 우리에 비해 여러 명이 서로 응원해 주고 잘하는 모습이 너무 좋아 보였다. 레이스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당장 주변의 크로스핏 박스를 검색했고 다음 날 바로 집 근처 박스로 체험을 가게 된다. 체험을 해보니 이거다 싶어 회원권을 끊고 그때부터 일주일에 3회씩은 열심히 나갔다. 나는 실행력이 좋은 편이다.
처음에는 뭐든 잘 안 됐다. 헬스랑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헬스는 천천히 자극에 집중하면서 하는 운동이라면 크로스핏은 빨리 기록을 내는 게 중요했다. 힘을 쓰는 방식 자체가 달라서 적응이 어려웠다. 바벨을 잡는 것도 어색했는데 그냥 참고 몇 달을 다녔다. 처음에 제일 좋아했던 동작은 ‘클린‘이라는 동작이었는데 바벨을 바닥에서부터 들어서 쇄골에 얹는 동작이다. 이걸 할 때 바벨이 그렇게 어색하다가 몇 달 뒤부터 리듬감 있게 쇄골에 탁 감기는 순간이 찾아왔다. 몸에 감긴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황홀할 지경이었다. 둥 탁 둥 탁 둥 탁. 경쾌하게 랩이 올라갔다. 나는 크로스핏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크로스핏은 제한된 시간 안에 나의 에너지를 모두 쏟아부어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기록을 내는 게 목적인 운동이다. 그래서 운동 시간은 짧지만 확실한 운동량을 보장한다. 나는 걱정이 많고 잡생각이 많아서 늘 이게 최선일까? 내가 최선을 다한 게 맞을까? 하며 사서 괴로워하는 인간이었다. 운동도 마찬가지였는데 크로스핏은 항상 끝을 알리는 휘슬이 울리면 ‘하얗게 불태웠다.‘라는 느낌만이 남았다. 최선을 다한 게 맞을까? 하는 의문을 갖는 것조차 사치일만큼 힘들었다. 큰 볼륨의 음악과 함께 정신없이 기록을 올리다가 딱 끝나면 정적 속에 탈진해 드러누운 사람들의 거친 숨소리와 땀냄새만이 가득했다. 죽을 것처럼 힘들었지만 끝이 있고, 끝나고 누워서 만끽하는 휴식은 그 어떤 것보다 달았다. 체질상 땀도 잘 안 흘리는 내가 땀을 뻘뻘 흘리며 바닥에 널브러져 있으면 엔돌핀과 도파민과 세로토닌 같은 게 다 뒤섞여서 나를 휘감는 듯했다. 그러면 기분이 미치게 좋아서 바닥에 누워 배시시 웃으며 생각하곤 했다.
태어나길 잘했어, 크로스핏도 하고
이게 어느 정도로 기분이 좋았던 건지 설명할 수 있는 일화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당시에 나를 힘들게 하는 남자친구가 있었다. 항상 오늘 밤에는 헤어져야지, 오늘은 꼭 헤어지자고 말해야지 다짐해 놓고 크로스핏이 끝나면 기분이 극도로 좋아져 버려서 모든 게 다 문제없게 느껴졌었다. 그래서 한동안 헤어지지 못했다.
두 번째는 크로스핏 하던 언니들과 나눴던 대화가 기억에 남는다. 다들 크로스핏에 진심이던 시절이라 오픈도 나가고 할 때였다. 지리멸렬하고 매일이 똑같은 일상에 극도로 몰입할 수 있는 뭔가가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지금은 크로스핏이 너무 재밌어서 인생이 행복한데, 지금이 너무 행복해서 나중에 크로스핏에 열정이 없어질 때가 오는 게 두려워. 그럼 나는 어디에서 행복을 찾을까 싶어서.‘라는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좋아했던 것 치고 아직 크린이로 봐도 무방할 만큼 수행 능력이 좋지 못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크로스핏이 끝났을 때의 그 기분을 사랑한다. 나는 이 마약을 놓지 못할 것이다. 놓을 이유도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