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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꾸 Aug 11. 2020

네 행복의 값어치는 얼마야?

여행 읽기


“그럼 6시에 메인 가트 선착장에서 기다릴게” 

 바라나시에서 만난 인도 소년 아밋과 약속을 했다. 정신없는 바라나시에서 영혼을 탈탈 털리고 조금 한산한 가트를 걷고 있을 때 아밋을 만났다. 그는 열두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짙은 쌍꺼풀에 깊은 눈을 가진 소년이었다. 그는 마치 나를 원래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친근감을 표시하며 자연스럽게 내 옆을 걸었다. 


그때 난 인도 사람들의 사기에 당할 만큼 당한 터라 인도인들과 말을 섞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질려있었다. 그런데 또 이 수상한 소년이 먹잇감을 발견한 하이에나처럼 내 옆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나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앞만 보고 걸었다. 소년은 내내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늘어놓았다. 그런데 그 말들이 왠지 모르게 소년을 한 번 더 쳐다보게 만들었다. 그 아이가 하는 말들은 이랬다.

“네가 입고 있는 옷은 면 100%야? 우와... 좋겠다. 인도에선 면 100% 옷은 굉장히 비싸. 그래서 난 그런 옷을 거의 입어본 적이 없어. 이것 봐. 이런 나이론 남방은 너무 더워”

“난 학교를 안 다니는데 내 친구들은 학교를 가. 그래도 괜찮아. 나는 지금 이렇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거든”

“인도는 어때? 네가 가 본 나라들 중에 어디가 젤 좋았어? 나도 담에 돈을 많이 벌면 여행을 많이 해보고 싶어. 난 아직 여기 바라나시도 벗어나 본 적이 없거든”

소년 아밋은 빨강머리 앤이 매튜 아저씨에게 끝도 없이 수다를 풀어놓듯이 내 옆을 지키며 조잘조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밋의 입담 때문일까? 그 소년에 대한 나의 경계는 조금씩 빗장을 풀고 있었다. 아밋이 하는 말을 맞장구치거나 질문을 하며 어느새 우리는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며 걸었다. 

그는 바라나시 구석구석을 안내하며 더없이 완벽한 가이드가 되어주었다.  해 질 무렵 배를 타고 갠지스 강을 보는 것이 정말 멋지다고 추천을 해주었다. 그러면서 자기의 삼촌이 뱃사공인데 우린 친구니까 싼 가격으로 배를 태워주겠다고 했다. 

그동안 ‘삼촌네 가게’란 말에 백만 번쯤 속아 넘어갔었던 나는 그 단어를 듣자 갑자기 다시 머릿속 의심 경고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를 쳐다보는 그의 커다랗고 깊은 눈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고 내게 말하는 듯했다. 

 한적한 아시가트에서 오후 반나절을 보내다 6시에 메인 가트에서 만나기로 한 아밋과의 약속을 깜빡 잊고 있었다. 부랴부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메인 가트로 달려갔다.

 다행히 내가 도착했을 땐 약속시간 오 분 전이었다. 헐떡이는 숨을 고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밋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좀 더 기다려보기로 하고 배 타는 곳에 쭈그리고 앉아 그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30분이 지나도록 아밋은 나타나지 않았다. 

“또 속았다! 정말 지독한 인도인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씩씩거리며 그렇게 속고도 또 한 번 보기 좋게 당한 내 머리를 쥐어뜯었다. 

 어느덧 넘어가는 해가 갠지스강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난 서둘러 아무 배나 잡아탔고 초를 파는 6살도 채 안 되는 꼬맹이에게 한번 더 속아 넘어간 뒤 하루를 마감했다.


다음날 바라나시 골목을 걷던 중 우연히 아밋을 만났다. 

‘그래 너 잘 만났다. 이 사기꾼아!’ 

나는 한바탕 따질 기세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나와 눈이 마주친 아밋은 아주 매서운 눈초리로 날 한번 노려보더니 등을 돌리며 가 버리는 게 아닌가?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미안하다고 말은 못 할 망정 저 뻔뻔한 눈초리는 뭔가? 어이가 없던 나는 또래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에게 따지듯 말했다. 

“왜 어제 약속을 안 지켰지?” 

그러자 소년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약속은 네가 안 지켰어”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난 어제 약속시간인 6시에 그곳에 갔었고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넌 나오지 않았어!” 

소년은 아주 차갑고 냉정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내게 다시 이렇게 말했다. 

“난 분명 6시에 거기 갔었고 너는 약속을 안 지켰어. 너 때문에 우리 삼촌은 다른 손님을 태우지도 못하고 그 시간에 돈을 벌지를 못했어”  

난 너무 화가 났지만 더 이상 말을 해봤자 말싸움만 될 것 같아 기분대로 퍼부어 버리고 돌아섰다.

“인도 사람들은 도대체 왜 항상 이런 식이지? 여행객들이 무슨 자기네들 먹여 살려주는 사람인 줄 아나 본데 정말 난 이런 인도인들이 너무너무 싫다!!” 

그동안 숱한 인도인들에게 당했던 억울함이 북받쳐 튀어나오면서 나는 흥분하고야 말았다.

 

아밋은 그 이후 아무 말도 없이 또래들에 섞여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그래도 마지막에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붓고 돌아서니 어느 정도 분이 가라앉는 듯했다.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속지 말자고 조심하고 의심하자고 혼자서 마음의 각오를 다졌다. 

 그런데 그는 조용히 따라오더니 차가운 표정으로 돈을 달라고 했다. 정확히 말하면 “Give me my money”라고 했다. 정말 맡겨놓은 자기 돈을 요구하듯 당당하게 my money라고 했다. 어제 가이드를 자처해 안내를 해주었고 나 때문에 삼촌이 돈을 못 벌었으니 내가 돈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질릴 대로 질려버린 나는 그냥 돈 푼 던져주고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5달러를 손에 쥐어 주고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아밋은 내 보폭을 맞춰 따라 걸으며 물었다. 

“ 너의 행복의 값어치가 5달러니?”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5달러... 내 행복의 값이 겨우 5달러? 아닌데.... 그렇다고 난 무지하게 행복하다고 내가 가진 돈을 다 줘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 아이 정말 사람을 어쩔 수 없게 만든다. 

그래도 배낭여행자인 내게 5달러의 적선은 후한 인심이라 생각했다. 행복의 크기를 어찌 돈으로 환산할 수 있겠냐만은 아밋은 행복을 금액으로 증명해 보이라며 나를 크게 한 방 먹이고 돌아섰다. 

 

며칠간의 바라나시 여행을 마치고 다시 델리로 향하는 기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차 번호와 시간을 확인한 뒤 기차에 올라 짐을 풀었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기차는 출발시간이 40분이 지나도록 꼼짝을 하지 않았다. 인도는 5시간 연착도 아무렇지 않은 나라이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지만 40분이 지나도록 기차 안에 사람이 별로 없다는 사실에 살짝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기차를 잘못 탄 걸까?’ 

기차에서 내려 기차 번호를 확인하고 자리로 돌아오자 사람들이 몰려서 타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기차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리고 20분 정도 흐른 뒤 내가 탄 기차는 역을 빠져나갔다.

 아무리 연착이 심하다 해도 1시간이나 이렇게 아무런 안내방송도 없이 늦게 출발하는 게 어딨냐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도착지에 내려 역사를 빠져나오며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난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리고 내 손목시계를 한 번 확인해보았다. 다시 벽시계를 보았다가 내 손목시계를 보고 그렇게 몇 번을 확인한 뒤에야 나는 시계가 한 시간 앞당겨져 있음을 알아챘다.

 순간 제일 먼저 아밋이 떠올랐다. 그 소년은 나와한 약속을 지켰던 것이다. 약속을 어긴 건 나였고 그로 인해 아밋의 삼촌은 하루 일당을 벌지 못했다. 그런데도 난 아밋에게 내 분풀이를 다 해버리고 떠나와 버렸다.

 

정말이지 시간을 다시 되돌리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소년에게 어떻게든 용서를 빌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바라나시를 떠나와 버렸고 난 아마 평생 그 소년을 다시 만나기 힘들 것이다. 내 삐뚤어진 시선이 한 소년에게 얼마나 큰 실망과 배신감을 안겨주었을까 하고 생각하니 한없이 미안한 마음이 밀려왔다. 

 아주 단편적인 모습만으로 그 나라를 제멋대로 평가해버리는 뜨내기 여행자들의 섣부른 편견은 이토록 어이없는 실수를 만들어냈다. 코끼리 발톱 하나 만져놓고 코끼를 다 안다고 자만한 내 모습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오만과 편견으로 고마웠던 친구 아밋을 잃어버렸다. 인도는 내게 힘든 여행지였지만 매 순간 모든 만남이 이유를 가진 가르침이었다. 나를 멋지게 속였던 수많은 그 인도인들이 모두 나의 길 위의 스승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바라나시에서 만난 나의 작은 스승 아밋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전하고 싶다. 


이전 17화 착한 사람은 세상 어디에든 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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