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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씨 Jun 11. 2021

25주년 장기근속 포상 소감 고민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또 진지병이 도졌다. 

5월 창립기념일을 맞아, 사내 인터넷망에 장기근속 사원들 소감 한 마디씩을 

사진과 함께 올린다는 메일을 받고나서부터 시작된 고민이다. 


무슨 말을 어떻게 써야 하나.

3~4줄이면 된다고 담당자는 심드렁하게 메일을 보냈지만, 

써야 하는 당사자 입장에서는 만감이 교차했다. 


25년, 숫자는 오래되었지만, 

잘난 선배 입네 하고 폼 잡을 상황은 되지 않는다.

적절한 스탠스 잡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시시하게 굴다가 나처럼 됩니다, 적절히 욕심을 내십시오’ 이렇게 솔직하게 쓸 수도 없고.

‘이만큼 버티느라 나도 애썼습니다, 이만하면 나로선 최선입니다’ 이렇게 말하기도 부끄럽고.


사실 솔직한 소통을 좋아하는지라 둘 중 하나의 방향으로 쓰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건 또 보는 사람들이 오히려 좀 부담스럽지 않나 싶었다. 


나이 든 선배의 너무 적나라한 마음 노출도, 

나이 든 어르신의 너무 과감한 신체 노출만큼이나 민망하지 않겠나. 


적당히 가릴 것은 가리고 숨길 것은 숨겨서

적절한 수준에서 말해야 피차 마음 편하고 좋은 법이다.

그리고 그 적절함의 수위 조절에서 선배의 센스가 빛 나는 거다.

나는 여전히 센스로 승부하는 멋진 선배가 아닌가.


물론 답변을 안 할 수도 있다. 

그러면 그냥 공란인 채로 사진만 덜렁 노출이 된다.

실제로 나처럼, 별 자랑할 것 없이 25주년을 맞은 몇몇 선배들은 

왕왕 그곳을 공란으로 남겨두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이든 정면 승부하는 스타일인 나로서는 피한다는 발상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따지고 보면, 이게 꼭 소감 한마디의 문제가 아니라,

25주년이라는 작금의 이 상황을 내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받아들이나 하는

스스로의 상황 정리 문제이기도 했다.


그냥 마냥 기쁘게?
아니면, 쑥스럽고 착잡하게?


별거 아닌(!) 요 소감 한마디 요청으로 

머릿속이 며칠간 대혼란이었다.


그리고, 고민 시작한 지 사흘 후 아침,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이 포상이란 게 

지금의 나, 미래의 나 말고

과거의 나, 그리고 열심히 살아온 지나온 시간에 대한 것이니,

그냥 그대로 감사하게, 기쁘게 받아들이자.


아직 정리 안된 미래의 계획으로 내 마음이나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지는 말자.


축하받을 것 축하받고, 생색낼 것 생색 내자.

이후의 행보는 올해 준비 상황을 보면서 나중에 결정해도 된다.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섞어서 같이 고민하면 솔루션이 안 나온다.

이 뻔한 답을 내는데 왜 아직도 이렇게 시간이 걸리는 걸까.


기획의 베테랑이라 해도,
역시 자기 일이 되면 제대로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법이다.




그래서, 마침내 담당자에게 송부한 소감 한 마디.


스물다섯 애송이가 반백의 베테랑이 되기까지,

함께 해준 모든 선후배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부침 심한 이 바닥에서 지금껏 버텨온 나 포함 모든 동료분들께 

고생했다고 한마디 전하고 싶네요. 여러분, 어디에서건 모두 찌아요!!




막상 게시가 되고 나니,

감사하게도

이러저러한 인연으로 같이 일을 했던 많은 동료, 선후배들이 

댓글을 많이 달아 주었다. 

그냥 마음 편하게, 쉽게 툭. 툭.


그러게, 괜히 당사자만 내 발이 저린 법.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냥 심상한 일일 뿐이다.

오래 봐온 저 선배가, 어느새 25년을 맞았군
용하다!  
딱 그 정도

어쨌거나, 짧은 댓글들 중에서

그래도 뭉클한 메시지들이 있어서 더욱 감사했다.


‘명징한 언어의 기획서에 늘 감탄합니다’ , 혹은

‘이번 제안 건 초반 짧은 시간에 방향 잡아주셔서 큰 도움되었습니다’처럼,

두리뭉실한 축하보다는 정확한 근거가 있는 칭찬들이 마음에 남았다. 


역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당분간은 이 힘으로 회사 다니지 않을까.


그리고, 앞으로는 어디서건 축하 댓글을 열심히 써야겠다.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감탄과 칭찬을 담아서. 


칭찬은 베테랑 선배도 춤추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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